신앙

추수감사절

장재휴
2020년 회사가 없어지고, 중국에서 버티기로 했던 동료가 한 명 더 있었다. 그 친구도 살길을 찾아 북경을 떠나 상해로 가야 했을 때, 이런 얘길 했었다. “이 세상을 강한 멘탈 만으로 살아가기에는 만만치가 않을 거야.” 그러면서 내가 믿는 하나님을 소개했다. “나도 멘탈이 꽤 강한 편인데, 그 멘탈을 믿고 살기엔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더라.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난 진작에 못 버티고 무너졌을 거야. 내 삶을 진짜로 지키고 싶으면, 멘탈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야 해.” 그 후 여기서 3년을 더 보냈다.

함께 아파하기. 기도하기.

장재휴
어제 아침 교회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뒤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고등부 아이들을 보는데,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 비슷한 또래 아이들이었을 텐데… 지금 내가 뭘 해야 할까…? 고등부 선생님으로써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있었다. 그건,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고 그 아픔을 함께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 이 아이들도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 접했을 그 충격적인 소식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을 텐데.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그것을 가르쳐야 했다.

허무해지지 않을 행복

장재휴
허무해지지 않을 행복이 있을까? (전도서 2장을 읽고) 행복의 방향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있을 때, 내가 없어져도 그 행복은 다른 사람 안에서 여전히 남아있다. 원래 목적이 그거였으니, 내가 가진 게 사라져도 상관없다. 나로인해 다른 사람이 행복해하는 것으로 이미 보상을 받았다. 그것이 곧 나의 기쁨. 어떻게 다른 사람의 행복을 목적으로 삼을 수 있을까? 2020년 초 회사가 없어졌다. 충격이 있었으나 거기서 걸어나올 수 있었던 건, 회사를 유지하는 것이 거기서 일하는 목적이 아니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있는 사무실을 나의 세상으로 정의하고, 나의 세상(사무실)을 변화시키는 것이 매일 출근해서 일하는 목적이었다.

혁신

장재휴
혁신은 대단히 획기적인 무언가를 들고 나오는게 아니다. 익숙하게 하던 일/생각을 다양한 방식으로 그려보고, 표현해보고, 이야기해보면 빈틈이 보인다. 그 빈틈을 메꾸려는 행동이 “혁신” 이다. 여기에 필요한 건, “추상화(abstraction)” 능력. 한발 떨어져 큰그림으로 볼 수 있어야 한다. 그걸 어떻게 연습 할 수 있을까? “변하지 않는 것은 뭘까? 변하는 것은 뭘까?” 늘 이 질문을 해 보는거다. 변하지 않는 것을 중심에 놓고, 변하는 것을 변수 자리에 놓아보자. 변수 자리에 다양한 상황을 넣어보다보면 추상화 된 그림이 그려진다.

꾸역꾸역 성경읽기

장재휴
매일 성경을 읽는 것은 우리 삶의 축소판 같다. 성경을 읽는다고 매번 엄청난 은혜와 깊은 묵상이 있는것은 아니다. 아주 가끔, 내 심장을 꽝 울리는 말씀을 읽고 새 힘이 뿡뿡 솟아오를때도 있지만, 그건 정말로 아주 가끔이다. 대부분은 지루하기 그지없고, 그래서 꾸역꾸역 읽는다. 하지만 그렇게 꾸역꾸역 읽어나간 성경이 천천히 내 안에 자리잡혀가는걸 보게 된다. 꾸역꾸역 읽어 나갔던 그 말씀이 없었으면, 황홀한 기쁨에 빠져드는 이벤트도 없었겠지. 우리의 삶도 마찬가지. 대부분 지루한 삶을 꾸역꾸역 살아간다.

언제나 축제날 같은 인생

장재휴
집에서만 생활한지 2주가 지났다. 매일 재택근무를 하니까, 옷도 안 갈아입고 어쩔땐 세수도 안 하고 바로 노트북을 켜고 일을 시작한다. 온라인 수업을 하는 지안이를 보면, 매번 아침마다 머리를 예쁘고 묶고 제일 예쁜 옷을 꺼내입고 노트북 앞으로 간다. 옷을 하루에 여러 번씩 갈아입을 때도 있다. 얘 왜 이래?? 그러다, 내가 좋아하는 말씀 구절이 생각났다. “옷은 항상 깨끗하게 입고 머리에는 향기로운 기름을 발라 언제나 축제날 같은 인생을 살아라.” 전도서 9장 8절 (현대어성경) 나도 오늘 좋아하는 옷을 꺼내 입었다.

장재휴
지난주 월요일 줌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 추도 예배를 드렸다. 설교는 아버지가 하셨고, 아모스 5장 24절 말씀이었다. 정의에 대한 말씀이었는데, 설교의 주 내용은 할아버지의 삶의 한 부분에 관한 이야기였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시며, 정의로운 삶을 선택해서 그렇게 살아가셨던 할아버지의 삶의 이야기였다. 할아버지가 한 번도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삶으로 보여주신 가르침을 배우며 살자는 말씀이었다. 나에게도 그런 배움이 있다. 많은 부분이 있지만, “돈”에 대한 가치관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부모님의 가르침이 있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

장재휴
얼마 전, 내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는 (늘 신선한 글로 내 생각을 틔워주셨던) 김재수 선배님의 이야기가 화두였다. 김재수 선배님은 <청소년 매일성경>에 칼럼을 기고해 왔는데, 지난달 성경의 “다섯 달란트 비유"를 한 달란트 받은 사람 입장에서 해석한 글을 실었다. 그 글에 대해, “주류에 어긋난 좌파식 성경 해석"이라는 항의가 빗발쳤고, 결국 <청소년 매일성경>에서는 김재수 선배님의 연재를 중단했단다.(기사 보기) 성경 해석에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담았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는 설교시간에 이 얘기를 하면서 김재수 선배를 ‘악마, 마귀, 사탄’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교회는 어떻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가

장재휴
몇몇 소수의 모습이겠거니 생각했었다. 근데, 소수가 아닌 것 같다. 나 역시 교회 공동체 속에서 자라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꽤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멤돌고 있었던 생각이다. 감정을 빼낸 상태의 글을 이제야 공유해 본다. 교회는 어떻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가? 교회의 바운더리 교회에서 금기시되는 말이 있다. 그 말을 꺼내거나, 모두가 동의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혼난다.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로 혼나게 되면 억울한 마음이 들고 기분이 나쁘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주진 않는다.

하나님의 군대

장재휴
… 너희가 너희보다 강대한 나라들을 차지할 것인즉 신명기 11:23 하나님은 이스라엘 민족에게 **"너희보다 강한 나라들을 너희가 차지할 것이다"**라고 하셨다. 이 세상은 너무 커 보이는데 그에 비해 나는 참 작은 것 같다. 이 세상에는 뛰어난 사람들이 참 많은 것 같다. 하지만 우리는 이미 그들이 그들의 방식대로 일궈놓은 세상 속에서 하나님의 나라를 세워나가야 한다. 나 같은 사람이 할 수 있을까? 나를 보면, 난 너무 작아 보이는데… 하지만 하나님은 어떻게든 하신다. 하나님 당신의 방식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