굿바이 2024
오랫동안 꺼내지 않았던 노트를 꺼냈다. 하루하루 많은 일이 일어나고 이 생각 저 생각이 휙휙 지나가고 있는데 글감은 말라간다. 글감은 가만히 있으면 나오지 않는다. 캐내야 한다. 글감을 퍼내는 도구는 노트와 펜이다.
신기하네. 노트와 펜을 꺼내
‘새벽에 잠이 깼다. 배가 아프다. 먹는 걸 조심해야겠다.’
이 첫 문장을 쓰고 나니 글감이 흘러나온다. 다행이네. 아예 꽉 막히진 않았구나.
노트를 뒤적이며 예전에 썼던 글을 봤다. 그땐 그저 휘갈기고 말았는데 다시 보니 맘에 든다. 옮겨보자.
타인의 시선은 생각보다 덜 중요하고 나의 시선은 생각보다 더 중요하다.
사람은 누구나 자신만의 시각으로 세상을 본다. 내가 살아가는 세상이 내가 해석한 세상이라면, 그 세상은 내가 만들면 된다. 나의 세상에 내가 가득 차 있는 것처럼 타인의 세상에 내 자리는 크지 않다. 타인의 시선은 그리 신경 쓸 필요 없다는 말.하고 싶은 걸 하자.
잘하고 못하고는 중요하지 않다. 중요한 건, 내가 하고 싶은 게 있다는 거고 그걸 그냥 하면 그만이다. 너무 하고 싶을 땐 잘하는지 못하는지가 별 의미가 없어진다. 너무 하고 싶은 그것이 나를 아프리카로 이끌었고, 말도 안 되는 여행을 하게 만들었다.
누군가에게 ‘나 그거(젬베) 하고 싶어요’라고 당당하게 말한 건 이번이 처음이다.
하고 싶은 게 있으면 그냥 하자._ 2024년 4월 20일
이 글이 나를 여기까지 이끌었구나. 저 글을 쓰고 청소년부 교사 MT때 젬베를 들고 갔었지.
- 겁도 없이 버스킹을 했고 (5월), 여름 수련회 찬양팀을 함께 했고 (7월), L.L.L 찬양집회도 함께 했다(11월). 그사이 중간중간 예배 반주도 몇 번 했다. 이제 곧 2025년 겨울 수련회 찬양 연습을 시작한다. 젬베폴라(젬베연주자)가 되어간다.
- 8월에 내 이름이 찍힌 책이 만들어졌다.
- 7월에 [코드스텝] 회사를 설립했고, 일을 만들어내기 위해 일 년 내내 뭔가를 해왔다. 부단하게 뿌린 씨앗이 조금씩 싹을 틔웠고 이제 첫발을 내디딘다.
12~3년 전쯤 어느 날 북경의 거리를 걸으며 생각했다.
‘누구나 자기만의 세상에서 살아가는구나.’
세상은 70억 인구가 모여 사는 하나의 지구별이 아니다. 누군가에게 세상은 100명 남짓한 사무실이고, 교회 공동체고, 골프 동호회고, 강의실에서 만나는 사람들이다. 생각이 미치는 범위, 영향력이 미치는 범위. 거기까지가 나의 세상이다. 자신이 정한 경계선 바깥의 일은 나에게 영향을 주지 않는다. 내 세상이 아니란 얘기.
이 땅에는 사람의 수만큼이나 많은 세상이 존재하겠구나. 하늘에 반짝이는 별만큼이나 많은 세상이 존재하겠구나. 한명 한명이 자신만의 고유한 세상을 만들어 반짝이고 있는 거구나. 난 나의 세상을 가꿔가자.
이 생각이 나를 여기까지 이끈 건가?
‘사람은 어떻게 움직이나?’라는 큰 질문을 해본다.
- 나 자신을 알기
이게 시작점이다. - (바깥에서 주입된 생각이 아닌) 내 생각을 하는 근육 기르기
- 나만의 푯대를 세워가기
멋있고 추상적인 격언 같은 게 아니다. 많은 상황 속에서 나의 작은 생각을 이끌어줄 수 있는 켜켜이 쌓인 선택의 기준들이다. - 그 푯대를 향해 움직이기. 행동하기
이때부터 나의 세상이 가꿔지기 시작한다. 행동이 쌓이면 열매가 나타난다. - 행동의 결과를 보며 푯대를 조정하기
- 더 과감한 움직임. 더 큰 행동.
- 더 큰 열매. 삶으로 증명된 기준이 만들어진다.
- 비로소 영향력이 생기기 시작.
일 년은 꽤 긴 시간이다. 뭔가를 이뤄내기에 충분한 시간이다. 생각을 결심으로 만들어 행동으로 이어가 결과를 만들어 낼 수 있다. 반면, 아무것도 안 하면 아무 일도 없이 순식간에 지나가 버린다. 매해를 엄청난 한 해로 만들 수 있다. 일 년의 싸이클은 큰 일을 이뤄내기에 충분한 시간이니까.
2025년은 더 큰 도전이다. 유목민의 삶을 제대로 시작한다. 뭔가를 이뤄내고 성취하는 도전이 아니다. 그저 끊임없이 움직이는 도전이다.
한창 거칠게 여행 다닐 때, 목적지는 별로 중요하지 않았다. 어디론가 가고 있는 상태가 중요했다. 난 그걸 즐기기 위해 여행을 떠났다. 어디론가 가고 있으면 됐었고 만나는 사람과 벌어지는 상황이 좋았다. 길에서 나 자신을 마주하는 것이 좋았고 하나님을 만나는 것이 좋았다. 뭘 보든 그게 그다지 중요하진 않았다. 몰랐던 나를 발견하는 것이 좋았고 새로운 하나님을 알아가는 것이 좋았다. 바로 이걸 하기 위해 배낭을 메고 멀리 떠난 거였다.
여행을 일상처럼 일상을 여행처럼.
아프리카에서 돌아와서 했던 말이다. 그때부터 일상을 여행처럼 살았다. ‘여행처럼’이란 말은 바로 요 위에 쓴 그런 거. 일상의 여행이 더 과감해진다. 겉으로 보기엔 스케일이 커졌을지 몰라도, 난 그저 1~8의 싸이클을 돌 뿐이다. 일상을 살아갈 뿐이고, 그저 여행을 즐길 뿐이다.
2024년 마지막 날을 보내며 폼나게 한 해를 마무리하는 글을 쓰고 싶었는데. ㅎㅎ 굵직한 일을 떠올리며 스스로를 칭찬도 해주고 자랑질도 좀 하고, 그런 글을 쓰고 싶었는데. 올해는 잘 안되네. 그냥 12월 31일의 일기다.
떠오르는 몇 가지만 적어보자.
- 버스킹
올해 가장 인상적이었던 장면이다. 몇 년 전부터 버킷리스트로 품고 있던 거였다. 용기를 냈고, 외부의 시선보다 간절히 원하는 내 마음에 충실했다. 젬베는, 지금까지 살아오면서 해 본 모든 것을 통틀어서 내가 가장 좋아하는 거다. - 책 출간
글 쓰는 걸 좋아하지만 사실 하기 싫은 게 글쓰기다. 한자 한자 쥐어짜고 생각을 캐내야 한다. 그 에너지가 꽤 크다. 하지만 하고 나면 가장 뿌듯한 것 또한 글쓰기다. 세상에 없던 뭔가가 나온 것 같다. 모르고 있던 나를 끄집어냈고, 그렇게 나타난 새로운 내가 나에게 영향을 준다. - [코드스텝] 회사 설립
하루하루를 작전 수행하듯이 보냈다. 새벽에 집을 나서며 한발의 총알을 장전했고, 그 한발의 초점으로 하루를 살았다. 대부분은 허빵이었지. 그렇게 꽉꽉 채워 일 년을 보냈다. 숱한 실패를 딛고 [코드스텝]을 시작한다. - 8번째 성경 일독
해마다 해오던 성경 일독을 작년에 멈췄었다. 한번 멈추고 나니 다시 가동하기 어렵더라. 교회에서 하는 90일 성경 통독 프로그램으로 간신히 살려냈다. 이제 꺼뜨리지 말자. 성경 통독은 나의 신앙 고백이다. 하나님 말씀대로 살겠다는, 몸으로 하는 다짐이다. - 고3 친구들과 함께한 청소년부
청소년 아이들과 함께하는 시간이 좋다. 이들이 나의 어린 시절을 생각나게 해준다. 지금보다 더 순수했던 그때, 지금보다 가치와 기준이 더 중요했던 그때. 그때의 나로 돌아가 오늘의 판단을 내린다. 그 선택이 나를 지켜준다. 그래서 이 아이들에게 참 고맙다.
한 친구가 ‘내년에도 청소년부에 계셔서 다행이에요’라고 말한다. 나도 이 아이들이 있어서 다행이다.
2024년. 굿바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