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리뷰]강영안의 공부한다는 것
강영안, 최종원 『강영안의 공부한다는 것』, 복 있는 사람, 2013
저자 정보
1952년 경상남도 사천에서 태어났다. 고려신학대학(현 고신대학교) 재학 중 네덜란드에서 신학을 공부할 생각으로 한국외국어대학교로 옮겨 그곳에서 네덜란드어와 철학을 공부했다. 1978년 벨기에 정부 초청 장학생으로 벨기에로 건너가 루뱅 대학교 철학과에서 철학학사와 석사 학위를, 1985년 네덜란드 암스테르담 자유 대학교에서 칸트 연구로 철학박사 학위를 받았다. 네덜란드 레이든 대학교 철학과 전임강사로 형이상학과 인식론을 맡아 강의했으며, 귀국 후 계명대학교 철학과 교수를 거쳐 1990년부터 2015년까지 서강대학교 철학과 교수로 재직했다. 벨기에 루뱅 대학교 초빙 교수로 레비나스를 연구했고, 미국 칼빈 칼리지에서 초빙 정교수로 서양철학과 동양철학을 강의했다. 한국철학회, 한국칸트학회, 한국기독교철학회 회장을 역임했고, 현재 서강대학교 철학과 명예교수이자 한동대학교 석좌교수, 미국 칼빈 신학교 철학신학 교수로 재직 중이다.
저서로는 『믿는다는 것』『철학자의 신학 수업』『대화』(복 있는 사람), 『강교수의 철학이야기』『신을 모르는 시대의 하나님』『강영안 교수의 십계명 강의』『읽는다는 것』(IVP), 『생각한다는 것』(두란노), 『철학은 어디에 있는가』『어떻게 참된 그리스도인이 될 것인가』(한길사), 『주체는 죽었는가』『자연과 자유 사이』(문예출판사), 『타인의 얼굴』(문학과지성사), 『도덕은 무엇으로부터 오는가』『인간의 얼굴을 가진 지식』(소나무), 『칸트의 형이상학과 표상적 사유』(서강대학교출판부), 『종교개혁과 학문』(SFC출판부), 『철학한다는 것』『묻고 답하다』(홍성사), 『우리에게 철학은 무엇인가』(궁리) 등이 있다. 옮긴 책으로는 『신은 존재하는가』(복 있는 사람), 『시간과 타자』(문예출판사), 『몸·영혼·정신』『급변하는 흐름 속의 문화』(서광사) 등이 있다.
기독교 지성인이자 철학자다.
내용 요약
강영안 교수와 최종원 교수가 공부에 대해 나눈 대담을 엮어낸 책이다. 성공 지상주의 시대에 목적을 이루기 위한 수단으로 전락해 버린 공부가 아니라, 읽고 사유하고 질문을 던지고 깊이 깨달아 삶으로 이어가는 참된 공부에 대해 논한다.
소감
공부하는 목적으로 3가지를 말한다. 알 수 없는 상태무지에서 아는 상태지가 되는 것, 할 수 없는 상태무능에서 할 수 있는 상태능가 되는 것, 느낄 수 없는 상태무감에서 느낄 수 있는 것감. 흔히 첫 번째, 두 번째만 생각한다. 세 번째가 중요한 이유는 ‘감’이 있어야 공부의 방향을 스스로 정하고 공부를 지속적으로 할 수 있다는 것이다. 공부를 통해 새로운 것을 느끼고 거기에 자극받아 또 다른 것에 대한 호기심이 생기고 그게 또 새로운 공부로 이어진다. 그래서 ‘감’이 없으면 공부를 이어갈 수 없다.
개발자야말로 공부하는 직업이다. 늘 새로운 문제가 주어지고 그것을 풀기 위해 씨름하고 더 나은 해결책을 위해 책을 찾아본다. 그렇게 하지 않으면 일을 할 수 없다. 일하는 것 자체가 공부다. 일하면서 자연히 공부하는 삶을 이어간다. 그래서 이 바닥에서 혁신이 많이 일어난다. AI가 등장한 지금, 공부하지 않아도 쉽게 답이 나온다. 머리를 전혀 쓰지 않아도 결과가 나온다. 대충 글로 표현하고 기다리면 내가 짠 것보다 훨씬 나은 코드가 만들어진다. 개발만이 아니다. 다른 분야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이제 의도적으로 공부하지 않으면 공부와 멀어지게 된다.
공부는 힘든 것이다. 공부라는 말 자체가 힘써서 무언가를 캐낸다는 의미. 쉽게 얻은 거라면 공부가 아니다. 어렵게 얻어낸 지식, 애써서 캐낸 지식. 그런 게 공부다. 나에게 공부는 책을 읽고 글을 쓰는 것이다. 책을 읽으면 사고에 균열이 생기고 그 틈새에 뭔가가 들어온다. 하지만 새롭게 생겨난 그 생각이 뭔지 모른다. 잡힐 듯 잡히지 않고 잘 설명되지도 않는다. 그걸 끄집어내 글로 쓰는 것, 힘들게 캐내는 것. 그거야말로 공부다. 아무리 AI가 세상을 뒤집어 놓고 난리를 친다 해도 절대 없어지지 않을 공부는 읽고 쓰는 것이다.
여기서 인문학과 이어진다. 인문학이 바로 읽고 생각하고 쓰는 것이다.
공명하는 책
2년 전 읽었던 『공부하는 삶』에서는 공부를 신으로부터 받은 소명이라 말한다. 진리를 발견하고 그 진리로 더 깊게, 더 넓게 들어가는 것을 공부라 말한다. 『강영안의 공부한다는 것』에서는 공부하는 삶을 살고 있는 한 사람이 자신의 공부 이야기를 들려준다.
반짝이는 구절
-
공부란 개인의 책상머리에서 이루어지는 지적인 노동만이 아니라, 시대를 읽고 분별하고 성찰하는 능력까지 포괄합니다. (11)
-
항상 그 자리에 계셔 주셨으면 하는 기대 (12)
-
아이는 외부 세계에 ‘적응’하고, 외부를 자기 안으로 ‘동화’하며 주변 세계와 평형을 유지하는 법을 배웁니다. 이 모든 것이 말하자 면 공부입니다. (23)
-
고통스러운 과정을 거쳐 능숙함에 이르고, 그 능숙함 속에서 자유와 즐거움을 맛 보게 됩니다.
이렇듯 공부는 적어도 세 단계를 거치는 삶의 과정이라 생각 합니다. 첫째는 힘들고 고통스럽게 기초를 익히는 학습 단계, 둘째는 반복을 통해 지식과 기술이 내면화되거나 습관화되는 단계, 셋째는 습득한 것을 바탕으로 자유롭게 창의적인 생산이 가능한 단계입니다. (25) -
지적 호기심 —> 탐구 정신
-
문제를 제기하고, 다양한 수단과 방법으로 답을 찾아가고, 민감하게 질문에 반응하고, 이를 통해 타인과 소통하는 이 모든 것이 인생 공부의 중요한 요소입니다. (25)
-
만약 삶이 공부이기를 멈춰 버린다면, 삶은 새로움과 생동감을 잃고 그저 주어진 틀에 고착되어 버리지 않을까요? (26)
-
그러니 ‘마음을 잃지 않고 주인이 되라’는 것입니다. 공부를 처음 시작할 때는 대부분 수동적인 상태일지 모르지만, 갈수록 점차 능동성이 커지고 마침내 경지에 이르면 창의적인 사유와 행동이 나옵니다. 그때 비로소 삶은 자유롭고 창조적이 됩니다. (35)
-
판단에서 계산으로 (51)
-
앎은 무감각에서 벗어나 느끼고 의식하고 공감하고 민감하게 반응하는 것과 관련이 있습니다. 알게 되면 알지 못하는 상태에서 아는 상태로, 할 수 없던 상태에서 할 수 있는 상태로, 느끼지 못하던 상태에서 느끼고 반응할 수 있는 상태로의 전환이 일어납니다. 그 전환 속에서 우리는 자유를 누리게 됩니다.
결국 앎은 단순한 정보의 축적이 아니라, 무지’로부터의 자유, ‘무능’으로부터의 자유, 무감’으로부터의 자유라 할 수 있습니다. 진정한 앎이란 인간을 변하게 하고 해방시키며 더 자유롭게 만드는 것입니다. (57) -
묻지 않으면 생각할 수 없고, 생각하지 않으면 알 수 없습니다. 알아야만 믿음을 삶과 연결시켜 볼 수 있습니다. (61)
-
읽고 쓰고 말하고 듣고 생각하는 다섯 가지 활동은 자연과학을 하든, 사회과학을 하든, 회사에서 어떤 업무를 보든, 어떤 상품을 광고하든, 무엇을 하든지 빼놓을 수 없는 활동입니다. (69)
-
소크라테스에게 질문의 목적은 무엇보다 ‘정의’를 분명히 하기 위한 것이었습니다. 인간이 아직 온전한 지식에 도달하지 못했다는 자각에서 질문이 시작되고, 그 답이 잠정적인 한 다시 묻는 과정을 멈추지 않습니다. (72)
-
이 땅의 신학은 여전히 물음을 품고 추구할 수밖에 없는 ‘순례자의 신학’이라 보았기 때문입니다. 더 완전한 앎에 이르기 위해서는 끊임없이 물을 수밖에 없다는 고백이 담겨 있는 것이지요. (73)
-
플라톤의 『소크라테스의 변론』에서 소크라테스는 이렇게 말합니다. 음미해 보지 않은 삶은 살 가치가 없다". 다시 말하면, “따져 보고 검토하지 않은 삶은 인간에게 살 가치가 없다"는 의미입니다. (73)
-
‘비판’(critique)이란 이것과 저것, 옳은 것과 그른 것, 좋은 것과 나쁜 것을 구별하고 판단하는 일입니다. (73)
-
“아는 사람은 좋아하는 사람만 못하고, 좋아하는 사람은 즐기는 사람만 못하다” (74)
-
좋은 질문은 기대하지 못한 답을 이끌어내고, 그런 경험이 반복되면 더 좋은 질문을 만들어낼 수 있습니다. (79)
-
‘회의적’(sceptical)’: 의심하고 부정하는 태도가 아니라, 서둘러 확정하지 않고 잠시 멈추어 숙고하는 태도, 판단 유보의 자세를 뜻하는 ‘에포케’입니다. (80)
-
『논어』 “배우되 생각하지 않으면 얻는 것이 없고, 생각은 하되 배우지 않으면 위태롭다" (92)
-
배움은 무지, 무능, 무감에서 벗어나 자유로워지는 과정입니다. 알지 못하던 것을 알게 되고, 할 수 없던 것을 할 수 있게 되며, 느끼지 못하던 것을 느끼고 받아들이게 되는 전환이 곧 배움입니다. 그 결과가 앎이고요. 오늘날의 교육은 무지와 무능을 극복하는 지와 능에 대해서는 많은 관심을 기울여 왔지만, 무감에서 벗어나는 부분 곧 ‘감’에 대해서는 상대적으로 무심했다고 봅니다. 요즘에는 교회조차도 이런 감수성을 잃은 것 같습니다. (102)
-
무능한 상태에서 유능한 상태로의 전환은 배움의 중요한 요소이지요. 하지만 더 중요한 것은 감성적으로 반응할 수 있는 태도’입니다. (102)
-
감은 지나 능의 바탕이 됩니다. …
모든 지식과 기술, 사람이 맺는 모든 관계에서도 ‘감’이 중요합니다. 어떤 경우에든 능동적으로 내가 주도하는 방식이 아니라, 지금 일어나는 일이나 상황, 행동, 관계에 대해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고 응답하는 태도에서 ‘감’이 형성됩니다. 내가 무엇을 하려고 하기보다는 나를 내어놓고, 나에게 다가오는 것에 주목하며, 느끼고 받아들이는 몸짓이 선행되어야 하겠지요. 그렇게 하고 나면, 어느 방향으로 나아가야 하고 어떤 능동적인 발걸음을 뗄 수 있을지 감이 잡힐 것입니다. 이렇듯 ‘감’의 시작은 수동성(수용성)에서부터 비롯되고, 그 상태에 나를 맡겨 ‘감’이 생기면 움직임이 따라옵니다. (103) -
감이 중요한 이유는 어떤 식으로든 모든 것은 관계가 지어져있기 때문에
-
배운다는 것은 일차적으로는 무지에서 인지로, 무능에서 유능으로 가는 과정이지만, 더 근원적으로는 무감에서 감수성을 지닌 상태로의 전환 과정이라 볼 수 있습니다. 이것은 ‘반응하는 능력’과 관계가 있다고 봅니다. (104)
-
그러나 앞에서 말한 ‘응답할 수 있는 능력’은 이러한 책임의 개념보다는 훨씬 근원적이고 원초적입니다. 존재론적 차원에서 타자의 부름에 응답할 수 있는 감응 능력을 말하지요. 어쩔 수 없이 끌릴 수밖에 없고 감응할 수밖에 없는 것에 대해 ‘나를 내어 놓을 수 있는 능력이자 태도’라고 말할 수 있겠습니다. 다시 말해, responsibilicy 곧 ‘응답 가능성’입니다. 히브리어로는 ‘힌네니’입니다. “내가 여기 있습니다"라는 뜻이지요. 지식인의 궁극은 지와 능을 넘어 감’으로까지 나아가는 것입니다. 관념으로만 알고 있거나 의지를 움직이는 정도에 머물러 감정, 느낌, 반응을 아우르는 ‘감’의 차원에 다다를 수 없는 지식은 참다운 지식이라 할 수 없습니다. (105)
-
참된 지식 역시 중립을 표방할 수 없습니다. (106)
-
현실에 초연해야 참된 지식에 이를 수 있다고 여기지만, 사실은 참된 지식과는 거리가 멉니다. 참되고 근원적인 앎은 반응하고 응답하는 능력과 무관할 수 없으니까요. 이 모든 것이 결국 ‘감’과 연결됩니다. (106)
-
우리는 왜 무엇을 알려고 할까요? 모르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모르는 것이 왜 문제입니까? 모르면, 누군가에게 혹은 무엇에 종속되기 쉽습니다. 알지 못하면 남에게 의존해야 하고, 의존하는 동안은 자유를 가질 수 없습니다. 참된 것을 알게 되면, 그 앎이 우리를 자유롭게 하지요. 자유는 사람을 넉넉하고 관대하게 합니다. 적어도 제대로 얻은 자유라면 세상을 공정하고 공평하게 대하도록 만들지요. (108)
-
뽈 리피르가 “이해는 오해를 전제한다"고 말한 것도 같은 맥락입니다. 무엇을 알려면, 순수하게 무지한 상태보다는 잘못 알고 있더라도 뭔가를 알고 있어야 더 알고자 하는 욕망이 생긴다는 뜻입니다. 그런데 내가 알고 있다고 믿었던 것이 실제로는 그렇지 않음을 깨닫게 되는 순간 우리는 놀라움과 당혹감을 경험합니다. 이 놀라움이 지적 추구를 자극하지요. 반대로 정서적 안정을 추구하거나 놀라움에 반응하지 않고 무시해 버리면 지적 추구는 멈춥니다. 그럴 때 당연하고 자명한 세계에 매몰되고 맙니다. (109)
-
진정한 배움은 내가 나를 스스로 가르칠 수 있을 때 비로소 일어납니다. (129)
-
그러나 공부는 그렇지 않습니다. 보고 듣는 것으로 끝나는 게 아니라, 자기의 것으로 소화하는 과정이 필요합니다. 이때 필요한 것은 내가 나의 선생이 되는 것입니다. (129)
-
하지만 ‘스스로 가르치지 않는 배움이 과연 오래 지속될 수 있을까’ 하는 의문이 생깁니다. 자기 자신에게 다시 설명하고 묻고 따져보고 되새기고 반성하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배움이 자기 것이 됩니다. 저는 이것을 ‘반성적 배움’(refective learning)이라 부르고 싶습니다. 단순히 들은 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아니라, 스스로 다시 물어보고 생각해서 체득하는 것이니, 저는 이것이야말로 진짜 배움이라 여겨집니다. (130)
-
외부 세계나 자연의 아름다움과 경이로움을 무시하지 않지만, 그 경이로움 못지않게 내 영혼과 자아에게 집중하고 이와 관련해서 타자를 발견하는 것이 인문학의 핵심이며 르네상스 인문학이 가진 강점입니다. (167)
-
만일 서구 인문학을 한마디로 정의한다면, 나에 대한 지식과 하나님에 대한 지식’이라 할 수 있겠지요. 이를 통해 타인을 이해하고 세상을 이해하는 것이 인문학입니다. (168)
-
‘자기 삶과의 연결고리를 만들라’ (191)
-
인공지능을 통한 지식의 발전이 현재 어느 단계에 있든, 우리가 배울 수 있는 능력(cachability)을 스스로 유지한다면 크게 염려할 필요는 없다고 봅니다. (192)
-
‘배움이 가능하다’는 것은 단순한 학습이 아니라, 배운 것을 돌아보고 불필요한 것을 덜어내며 다시 새롭게 배울 수 있는 능력을 의미합니다. 이 과정에서 여전히 고민해야 할 지점은 타자’ 라는 개념입니다. 낯선 것, 내가 아닌 것, 나와 다른 것, 익숙하지 않은 것에 대해 열린 마음으로 고민하고 받아들이는 것이 필요합니다. (192)
-
저는 공부가 여전히 재미있습니다. 그래서 공부하는 사람에게는 쾌락주의자(hedonist)의 기질이 있을 것이라 생각합니다. 공부를 통해 타인에게 나누는 기쁨이 있지만, 그 이전에 텍스트를 붙잡고 씨름하며 스스로 누리는 내적 기쁨이 있습니다. 잘 몰랐던 부분을 새롭게 발견하고 이해할 때의 즐거움, 생각이 확장될 때의 쾌감, 때로는 끝내 모른 채 남더라도 탐구 자체에서 오는 즐거움이 분명히 있습니다. 보편화할 수는 없겠지만, 대부분의 학자들이 그런 기쁨과 쾌락을 느끼지 않을까요? 본질적으로 그런 기쁨을 스스로 누리지 못한다면, 학자의 삶을 지속하기 어려울지도 모릅니다. (349)
-
루이스는 극적인 사례를 통해 “모든 사람은 본성적으로 알기를 욕구한다"는 아리스토텔레스의 말이 옳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유익하고 도움이 되기 때문에 앎을 추구하고 배우지만, 가장 좋은 배움의 이유는 역시 앎 자체가 즐겁고 좋기 때문입니다. 전쟁과 죽음의 현실 앞에서도 인간은 의미와 진리, 아름다움과 품위를 추구합니다. 그것이 바로 인간이라는 것이지요. 루이스가 말했듯, 전시에도 학문이 정당한 이유입니다. 학문은 지식의 축적이 아니라, 인간다움을 증명하는 행위이기 때문입니다. (35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