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릴 때 난 꿈이 없었다. 어른들이 ‘꿈, 장래 희망’ 이런 것들을 물어볼 때 나만 뭔가 뒤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축구선수’, ‘농부’, ‘선생님’, ‘의사’ 이런 대답을 바로 해버리고 싶었는데, 난 그런 게 없었다. “아직 없어요"라고 부끄럽게 말하기도 하고, 그때그때 ‘과학자’, ‘의사’ 이런 것을 만들어내서 말하기도 했다. 어른들이 그런 곤란한 질문을 할 때면 대충 얼버무리거나, 아니면 잠시 ‘루저loser 패배자‘가 되어야 했다.

고2 때 문과/이과를 나눠야 했다. 난 국어/영어보다는 수학/과학이 재밌었고 점수도 그쪽이 높았다. 그래서 고민 없이 이과를 선택했다. 고2 3월쯤으로 기억한다. 문/이과를 나눈 직후. 문/이과에서 갈 수 있는 대학 전공 목록, 직업 목록들을 쭉 봤는데. 이과 쪽에 나열되어 있던 전공/직업들은 전부 하고 싶지 않았다. 문과 쪽도 마찬가지… 그제야 처음으로 고민했다. ‘난 뭘 하고 싶은 걸까? 난 왜 아무 생각도 없이 이과로 왔을까? 수학/과학이 재밌다는 이유만으로?’ 이런 중요한 결정을 아무 생각 없이 했다는 생각에 나 자신이 바보 같았다. 그때 당시 경영학/경제학 이런 쪽이 눈에 들어왔고, 그냥 평범하고 무난해 보였다. 그래서 문과로 전과했다.역시 아무 생각 없이 ㅡ,.ㅡ;; 전과 후 꽤 혼란스럽고 힘들었었다. 별 고민없이 이과를 선택하고, 또 별 고민없이 문과로 전과하고. 당연히 문과가 끌릴 리가 없었다. 게다가 그때는 봄 예술제 준비가 한창일 때여서, ‘난 3반(이과)인가? 1반(문과)인가?’ 정체성에 혼란이 있었다.

결국, 그렇게 고등학교 시절을 보냈다. 대학 입학을 앞두고 또다시 고민해야 했다. 꿈도 없이, 문/이과에 대한 확신도 없이 살아왔는데, 당연히 가고 싶은 대학/전공을 선택할 수 없었다. 그때 한동대가 눈에 들어왔다. 이유는 간단했다. 한동대는 전공이 없었다! 한동대는 무전공으로 입학을 하고, 2학년 때 전공을 선택한단다. 한동대를 온 대부분은 자신만의 스토리/간증 거리가 있다. 눈물 없이 들을 수 없는 ㅋ 하지만 내가 한동대를 선택한 이유는 너무 단순했다. 전공을 정하지 않아도 되니까. 대학 가서, 이쪽저쪽 수업도 들어보고, 선배들 교수님들과 상담도 해 보고, 그러면 좀 더 잘 결정할 수 있지 않을까? 고3 때 하는 선택을 그냥 1년 유보한 거였다.

대학교 1학년 때 컴퓨터 관련 수업을 들으면서 처음으로 공부가 재밌었다. MS Word에 그림을 넣을 수 있는 게 신기했고 Excel을 만지작 거리는 것도 흥미로웠다. HTML은 정말 재밌었다. 그리고 C 프로그램 수업을 들으면서, 프로그래밍의 재미에 빠져들었다.처음으로 짠 프로그램이 까만 터미널 화면에서 돌아가던 그 짜릿함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다! 학교 전산실에 죽치고 앉아 맨날 C 프로그래밍을 하고 있었다. 밥도 안 먹고 화장실도 안 가고 13시간 동안 자리한번 안 뜨고 전산실 문 닫을 때까지 코딩만 한 적도 있었다. 공부가 이렇게 재밌다니! 난 당연히 ‘전산/전자’를 전공으로 선택했고, 대학 내내 어렵지만 재밌게 공부를 했다.

하지만 난 여전히 꿈이 없었다. 한동대 학생이라면 ‘Why not Change the World!?‘라고 외치며 세상을 변화시키겠다는 마음 한번쯤은 먹어봤을 텐데, 난 그런 거에는 관심이 전혀 없었다. 그냥 친구들끼리 시시덕거리며 농담 따먹기나 하며, 여기저기 놀러 다니며 대학교 4년을 보냈다.

대학교 4학년. 이제 취업을 준비해야 할 때. 꿈이 없는 난 이런 결정 앞에서 또 망설였고, 그냥 주변 친구들 따라서 여기저기 원서를 돌려댔다. (갑자기 궁금한 것 한가지. 어릴 때 자기 꿈을 자신 있게 얘기하던 그 친구들은 이때는 어땠을까? 여전히 그 마음이었을까?ㅎㅎ) 그때 한동대학교는 삼성/LG에서 다 데려간다는 말이 나올 정도로 삼성/LG에 대한 취업율이 높았다. 근데 난 인·적성 검사에서 다 떨어졌었다. 나의 인성 점수는 왜 이렇게 바닥이었을까?ㅋㅋ

‘이랜드시스템스’라는 회사의 채용공고를 봤다. 헉ㅡ 자기소개서를 10장이나 써야 했다. (다른 대부분 회사는 2~3장으로 끝났었는데.) 글이라곤 써본 적이 없었던 나는 그냥 포기했다가, 마감 직전에 대충 10장을 채워서 입사지원서를 넣었다. 서류를 통과하고 두 번의 면접을 통과하고 합격통지가 왔다. 그때 당시 아기들 옷 파는 회사로만 알고 있었던 ‘이랜드’가 컴퓨터 프로그래밍을 좋아하던 나와 어울린다고 생각할 리 없었지만, 기나긴 취업 준비 과정을 또 거쳐야 한다는 게 너무 귀찮아서(그건 정말 쓸데없는 일로 보였다) 그냥 이랜드에 가기로 했다.

그때 가까이 지내던 교수님이 하신 말씀이 아직도 기억난다. 난 전자통신 쪽에 좀 더 비중을 두고 공부를 하고 있었는데, 완전 다른 분야의 회사에 입사하게 되어서 고민이 되었다. 그때 교수님께서 이런 말씀을 하셨다. “대학 4년은 생각보다 아주 짧은 시간이다. 앞으로의 시간이 훨씬 길다. 짧은 대학 4년으로 앞으로의 길을 결정짓지 마라” 이 말은 나에게 각인되었고, 지금도 어떤 결정 앞에서 교수님의 이 말씀을 떠올린다. 지금까지의 짧은 경험으로, 앞으로의 내 인생을 결정짓지 말자.

2006년 여름. 처음 사회에 나와 일을 해 보니, 너무 힘들더라. 매일 아침 7시에 출근해서 12시를 넘겨서 퇴근했다. 좀비처럼 일만 하며 살았다. 근데, 어이가 없었던 것은. 사회생활을 시작한 대학교 친구들을 만났는데, 그들도 똑같이 회사 욕하며, 상사 욕하며 좀비처럼 살고 있더라. 대학 다닐 땐 ‘세상을 변화시키자’며 울고불고 소리지리던 친구들이, 사회의 높은 벽 앞에 부딪혀 그냥 세상 한탄하며 살고 있더라. 그때 처음으로 꿈이 생겼다. Why not Change the World!? 세상을 변화시키자! 너무나 두텁고 높은 이 세상의 벽. 허물어 버리자!

교회 친구들과 World Changer라는 동아리를 만들었다. 이 세상을 알고 하나님을 알기 위해 책을 읽고 공부를 하며 생각을 나눴다. 그리고 모일 때마다 꿈을 얘기했다. 참 좋았다. 이렇게 하면 세상이 바뀔 것 같았다. 그리고 이 넓은 세상을 직접 보고 싶어서 해마다 여행을 다녔다. 유럽, 미국, 인도, 아프리카, 남미… 각 대륙에 흩어져 사는 사람들의 삶을 찐하게 경험하러 다녔다. 한평생 세상을 바꾸고 싶었지만, 늙은 노년에 ‘나 한사람 바꾸기도 쉽지 않더라’라고 했다는 어느 누군가의 얘기는 포기한 사람의 한탄처럼 들렸다. 우리도 나중에 나이 들어서, ‘아~ 세상의 변화는커녕, 나 한사람 바꾸기도 어렵구나.’ 이런 말을 하게 될까 봐 두려웠다. 불같이 타오르며 시작됐던 나의 첫 번째 꿈은, 처음의 그 뜨거운 불길이 쭉 지속되진 않았지만, 그래도 내 가슴 한가운데에 남아서 내 삶을 이끌어왔다.

세월호 사건이 있고 얼마 후, 광화문에 있는 세월호 분향소에 갔었다. 아이들 얼굴 하나하나를 보며, 그 아이들 앞에서 다짐했다. “책임지는 어른이 되겠다” 고. 그때쯤부터 거창하게만 얘기했던 “세상의 변화"를 나만의 언어로 다시 표현했다.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자. 내가 이 세상으로부터 받은 것보다 더 많이 돌려주자” 이 세상에 문제가 있다면, 이미 어른이 된 나는 그것에 대한 책임을 져야 한다. 책임지는 어른이 되어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자!

요즘 매일 아침 얼굴을 보며 미팅을 하는 30여 명의 동료가 있다. 어느 날 이런 생각을 했다. ‘여기가 바로 나의 세상이구나.’ 대학을 졸업하고 처음 사회에 나왔을 때, 세상을 변화시키고 싶었다. 그 마음으로 지금까지 살아오며 배운 것 한가지는, 그 세상의 변화는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 그 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라는 것. 어디서 뚝 떨어져서 크고 멋있게 진행되는 그 일들은, 오래 못 가더라. 아주 조금일지라도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움직였을 때, 그런 일들만이 지속될 수 있다. 결국, 내 옆에서 살고 있는 그 사람들이 바로 나와 함께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갈 사람이다. 그런 의미에서, 지금 나의 세상은 바로 나의 사무실이다. 그리고 나의 세상인 이 사무실에서, 지금까지 살면서 처음으로, 아주 작지만, ‘영향력’ 이란 게 생긴 것 같다.

날마다 가치를 얘기한다. 어제 한 일의 가치를 얘기하고, 오늘 할 일을 공유한다. 그들 한명 한명의 삶이 보이고, 그들도 이제는 나에게 자신들의 삶을 얘기한다. 코드를 짜는 것부터, 결혼, 육아, 꿈에 관한 이야기까지. 때론 눈물을 흘리면서 속마음을 얘기하는 동료도 있다. 일하다가 몇 번 화를 낸 적이 있다. 무가치한 일을 생각 없이 하는 모습을 봤을 때다. 맹목적으로 뭔가를 따라 할 때다.
‘책에서 배운 건 집어치워. 남의 회사 이야기도 집어치워. 난 그런 거 다 집어치우고, 지금 여기서 한 발짝 나가는 것만 생각할 거야
이들의 삶이 조금 더 나은 삶이 되었으면 좋겠다. 자기 자신을 찾고, 자신의 삶을 살아갈 수 있었으면 좋겠다. 이들 한명 한명을 더 가까이 하고이게 사랑인가? 이들이 진심으로 자기 삶을 찾아갔으면 좋겠다. 나에게 주어진 이 작은 세상을 조금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가 보자! 잘 하지 못해도 상관 없다. 지금 이 자리에서 한발짝 만이라도 움직일 수 있으면 그만이다.

누군가 했다던 이 말.
‘세상을 바꾸고 싶었지만, 나 한사람 바꾸기도 쉽지 않더라.’
어쩌면 이런 말을 할 수 있는 사람이, 비로소 세상을 바꿀 수 있는 사람이 아닐까 생각이 든다. 왜냐하면 세상의 변화는 하늘에서 뚝 떨어지지 않으므로. 지금 내가 서 있는 그 곳에서 시작되어야 하는 것이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