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은퇴

지난 주일. 아버지가 은퇴하셨다.
마지막 은퇴예배에 함께하진 못했고, 사진으로만 보아야 했다.
이제 목회 자리에서 내려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30대 중반 처음 목회를 시작하셨을 때의 모습 그대로셨다. 사람들이 가지 않는 시골 변두리 마을에서 목회를 시작하셨고, 마지막 모습도 여전히 그러하셨다.

우리는 한결같은, 변함없는 이런 단어보다 성장, 발전 이런 단어를 더 좋아한다. 세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아지고 더 커져야 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건, 어느 한쪽 파이를 떼내어 다른 쪽에 같다 붙이는 제로섬의 싸움은 아닌지… 이런 시대에, 처음 모습을 마지막까지 그대로 지켜오신 아버지의 한결같은 삶이 자랑스럽다.

내가 기억하는 아버지의 모습

대구 달구벌교회 (1986~1989)

  • 지하실 교회
  • 상가 2층 교회. 40일 금식기도
  • 월암동으로 교회 건축해서 이사

나중에서야 알았다. 애들 셋 있는 가장이 회사를 그만두고 신학교를 간다는 게 일반적이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이제 막 신학교에 들어간 전도사 시절에 교회를 개척한다는 것이 쉽지 않다는 것을. 그리고, 그 상황에서 40일 동안 금식기도를 한다는 것은…

이미 삼십 대 중반, 대부분 아저씨들이 어릴 적 꿈은 이제 추억으로 묻어두고 현실에 순응하며 살아가기 시작할 때, 아버지의 꿈은 이때부터 시작되었다.

대전 (1990)

언젠가 아빠한테 물어본 적이 있다. 그때 왜 대전으로 갔냐고. 힘들게 개척한 교회에서 쭉 목회 하는 게 더 쉽고 자연스럽지 않냐고. 아빠의 대답은, 보통 개척하고 나면 “내 교회”라는 마음이 생기기 마련인데, 그래서 떠나는 거라고 하셨다.

요즘 대형교회에서 돈 문제, 목회 세습 문제, 등 좋지 않은 모습이 보이기도 하는데, 그래서 그때 아빠의 선택이 더 자랑스럽다.

하동 (1991~1992)

언젠가 또 아빠에게 물었었던 것 같다. 그때 왜 하동으로 갔었냐고. 아빠의 대답은, 교회에 목회자가 없어서, 그래서 그곳에 간다고 하셨다.

아마 제일 신나게 목회하셨던 곳이지 싶다. 그 시골 마을에, 학교 전교생이 100명 좀 넘는데, 여름성경학교에 100명이 넘게 왔었다. 개학하고 학교에 가니까 몇 명 빼고 전부 여름성경학교 티셔츠를 입고 왔더라. 40대 초반, 여러모로 가장 왕성할 때 가장 열정 넘치게 목회를 하셨던 것 같다.

경주 (1993~)

  • 목사 안수
  • 교회 개척
  • 장기기증

또 아빠에게 물었었다. 그때 왜 경주로 갔었냐고. 아빠의 대답은, 목회하기 어려운 교회여서 간 거라고 하셨다. 지금 생각에, 아빠에게 가장 전투적인(?) 목회지가 아니었나 싶다.

동네 유지의 자리를 교회에서도 그대로 유지하려고 터줏대감처럼 자리를 지키고 있는 장로님들과 전투적으로 싸워가며 교회 개척을 시작했고, 기적적으로 서울 영암교회와 연결이 되어 건축비가 마련되었다. 헌당 날짜를 맞추기 위해 전 교인들이 함께 공사에 참여해서 벽돌과 시멘트를 날랐다. 중학생이었던 나도 같이. 교회 건축하면서 하나님과 했던 약속을 지키기 위해 신장을 기증하셨고, 연고도 없이 아빠의 신장을 기증받은 사람의 남편이 감사의 마음으로 자기 신장을 내어놓았다. 그렇게 장기기증 릴레이가 이어져 7명의 몸이 고쳐졌다. 성도들에게 가장 많이 시달렸던 곳도 이곳이었지만, 아버지는 꿋꿋이 자리를 지키셨다.

성주

  • 뜻밖의 은퇴
  • 주차빌딩 주차안내원/식당

뜻밖의 은퇴로 아빠는 주차빌딩에서, 엄마는 식당에서 일하게 되었다. 30년이 넘게 목사/사모로 살아오셨던 두 분은 그런 자리에 개의치 않으시고, 실제 삶의 현장으로 들어가
목사/사모가 아닌 평신도의 삶으로 기꺼이 들어가셨다.

안동

선물처럼 주어진 다시 시작된 목회. 이곳에서 마지막 목회를 하셨고, 2022년 4월 24일 은퇴 하셨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