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인칭 시점으로 돌아본 수련회
주님의교회 청소년부 겨울 수련회
2025년 2월 7일 ~ 9일
강화성산예수마을
다양한 모습의 예배자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고 찬양을 이끈다. 그 앞으로 뛰어나와 온몸으로 춤을 추며 찬양한다.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한쪽 옆엔 여러 악기로 소리를 만들어내는 세션 팀이 있다. 멀찍이 앉아서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가사를 읊조린다. 저 뒷자리에 서서 두 손을 높이 들고 부르짖는다. 중간중간 지쳐 있는 아이들도 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찾고 있다. 음향, 조명, 영상으로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을 한곳으로 모은다.
예배자는 더 넓은 곳에 퍼져있다.
반 친구들과 프로그램 활동을 하며 왁자지껄 웃고 떠든다. 선생님들께 다가가고 싶지만 머쓱해서 머뭇거리는 아이들은 드라크마를 구실로 삼아 용기를 내본다. 겉으론 예배가 지겹다고 버티지만, 사실 마음속 깊은 곳에는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 선생님의 권유에 마지못해 예배에 가는 척하지만, 어쩌겠나 그게 그 시절의 자존심인데. 그 정도야 지켜줄 수 있지. 한번, 두 번, 세 번, 네 번 계속 권유 하며 그들의 진심을 지켜갈 수 있도록 도와준다. 바깥엔 노란 조끼를 입은 스텝들이 바삐 움직인다. 이들의 수고로 굵직한 프로그램들이 물 흐르듯 움직인다. 쉬는 시간, 복도에 서서 청소년부 예배를 고민하며 대화하는 리더 친구들도 있다. 생일인 친구를 위해 깜짝 파티를 준비하는 얼굴에 웃음이 가득하다. 그 생일파티를 직접 보지는 못했지만 거기에도 사랑이 가득했겠지. 수련회 마지막 날 밤샘은 국룰, 방 곳곳에서 들려오는 게임 소리가 듣기 좋다. ‘이런 것까지?’ 라는 생각이 들 정도로 행정업무가 꼼꼼하게 준비되어 있다. 모두가 각자에게 주어진 좋은 것을 택하였고 그것을 빼앗기지 않았다. 이 모든 것이 하나님이 기뻐 받으시는 예배였으리라 믿는다.
하나님과의 만남
“저 하나님 못 만났어요”
둘째 날 예배 끝나고 한 아이가 와서 말한다.
사무엘은 하나님의 세미한 음성을 듣는다. 분간하기 어려울 정도로 너무 작아서 사무엘은 그 소리를 무시한다. 설마 하나님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세미한 음성이 들리고 또 들린다. 사무엘은 제사장을 찾아가 그것이 무엇인지 묻고, 제사장은 하나님이 부르시는 거라고 알려준다. 이것이 사사시대를 끝내고 다윗을 등장시킨 위대한 선지자 사무엘이 하나님을 만나는 장면이다. 모세처럼 떨기나무 위에 타오르는 불의 모습으로 하나님을 만날 수 있다. 하지만 하나님은 사무엘에게처럼 들릴락 말락 하는 아주 작은 음성으로 다가오기도 한다. 사무엘에게도 하나님을 만나는 모습이 정형화되어 있었을까? 불처럼 뜨겁게 임하는 하나님의 모습을 고정해 놓아서, 자신에게 속삭이듯 다가오는 하나님을 알아채지 못했던 걸까?
”넌 이미 하나님을 만났어. 너 마음속에 하나님 말씀대로 살고 싶어 하는 마음 있지? 하나님을 만나지 않았으면 절대 그런 생각을 할 수 없어. 그게 하나님을 만났다는 증거야.”
“아, 저도 하나님 만난 거예요?”
“물론이지”
사실 이 말은 어린 시절의 나에게 한 말이다. 나에게도 누가 이걸 알려주었더라면 긴 청소년 시기를 그렇게 열등감 속에 보내지 않았을 텐데. 내가 그리는 하나님과의 만남 장면이 연출되지 않아 답답해하며, (아무렇지 않은 듯했지만) 수련회 때마다 패배감에 휩싸이며 교회에 등을 돌리지 않았을 텐데.
16살 장재휴의 모습을, 16살 그 아이에게서 발견하며 이 말을 해 주었다.
“너 안에 있는 작은 마음을 키워가자.”
작은 마음
하나님과 우리 사이에는 어떤 막이 있는 것 같다. 그 막이 얇을 때도 있고 두터울 때도 있는데, 대부분은 너무 두텁다. 그래서 하나님이 잘 보이지 않는다. 하지만 하나님은 그 두터운 막을 뚫고 다가오신다. 아직은 그 막이 너무 두터워서 하나님이 작게 느껴진다. 그래서 우리는 작은 마음을 키워가야 한다.
진짜는 적고 가짜는 많다. 옳은 길은 희미하고 옳지 않은 길은 선명하게 보인다. 정신을 차려야 좁은 길이 보이지만 세상은 온갖 수단을 총동원하여 우리를 혼미하게 만든다. 그래서 가짜를, 옳지 않은 길을, 넓은 길을 선택하게 한다. 어떻게 방향을 확 틀어서 좁은 길에 들어설 수 있을까?
작은 마음을 선택하기. 어렵게 선택한 작은 마음을 키워가기.
좁은 길은 다른 사람들 눈에는 보이지 않는다. 그래서 바보처럼 보인다. 모두가 반대한다.
바보 같은 그 길, 모두가 반대하는 그 길을 선택하자.
버티기 신앙
“잘했어. 이렇게 신앙생활 하는 거야”
긴 예배 시간을 꾸역꾸역 버텨낸 아이들을 칭찬했다.
신앙생활에 짜릿하고 흥분된 순간이 있다. 하지만 이건 일상이 아니다. 가끔 찾아오는 이벤트다. 이런 이벤트를 중심에 놓으면 신앙을 지속하기 어렵다. 오히려 신앙의 많은 시간은 밋밋하고 지루하다. 꾸역꾸역 재미없는 성경을 읽고, 지루한 말씀을 듣고, 내 입으로 한 글자씩 내뱉으며 기도를 해 나가야 한다.
한명 한명 아이들의 마음을 확인했다. 이 어린 친구들에게 하나님을 만나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다.
“선생님이 하나님을 만나는 방법을 알려줄게. 우리가 하나님을 가까이하면 하나님도 우리에게 가까이 오실 거야. (야고보서 4:8)”
“진짜요?”
이 말에 전혀 관심을 보이지 않을 것 같던 한 친구가 눈을 똥그랗게 뜬다.
“하나님을 가까이하는 거? 그거 어려운 거 아니야. 찬양할 때 찬양하고, 말씀 들을 때 말씀 듣고, 기도할 때 기도하면 돼.”
긴 시간 동안 아이들이 이걸 해냈다.
결과는 금방 사라진다. 내 안에 쌓이는 건 결과가 아니라 과정이다. 본성을 거스려가며 옳은 것을 향해 꾸역꾸역 나아갔던 그 시간은 나를 배신하지 않는다. 희미했던 하나님의 모습이 조금씩 선명해진다. 이걸 계속 해 나가는 것이 신앙생활이다. 긴 예배 시간 동안 이걸 견뎌낸 아이들을 마음 다해 칭찬한다.
직업 선택의 십계
둘째 날 예배 시간, 고등학교 때 들었던 선생님의 가르침과 비슷한 말씀이 들려왔다. 타임머신을 타고 27년 전으로 돌아간 기분으로 설교를 들었다. 신기하다. 목사님이 정말로 거창고등학교를 얘기하신다. 직업 선택의 십계를 하나하나 다시 읽는데 가슴이 찡~ 했다.
고등학교 땐 귓등으로 들었었다.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니, 말이 되나?
첫 월급을 받아보니, 그게 얼마나 더더더 바보 같은 소리인지 알게 되었다. 월급이 적은 쪽을 택하라니, 미쳤나?
어릴 때부터 있던 반항심리가 이상하게 작용한다. 말도 안 되는, 미친 소리 같은 그걸 진짜로 해보자는 오기가 생긴다.
고등학교를 졸업한 지 8년이 지난 2008년 어느 날 일기장에 이런 글을 썼다.
“내가 배운 것이 옳은 것임을 보여주고 싶다.
나의 모교 거창고등학교의 교육이 실패한 교육이 아님을 보여주고 싶다.
내 후배들에게, 내 아들에게,
난 학창 시절 이런 가르침을 받았다고, 너희도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떳떳하고 당당하게 얘기해주고 싶다.
무엇이 옳은 것인지, 어떻게 사는 것이 바르게 사는 것인지 자신 있게 말해주고 싶다.
이것이 맞는 삶이라고, 세상 모든 사람이 아니라고 해도 이것이 맞는 거라고, 이렇게 살아야 한다고
그것을 내 삶을 통해 말해주고 싶다.무엇보다, 나 자신에게 당당하고 싶다.”
_2008. 2. 25.
아내도 목사님이 하나하나 읽어주시는 ‘직업 선택의 십계’를 들으며 눈물이 핑 돌았단다.
내가 거창고등학교 가르침의 영향을 많이 받았구나. 우리가 이렇게 살고 있구나.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8년이 지나 했던 다짐을, 그 후로 또 17년이 지난 지금, 내 삶을 가장 가까이서 봐온 아내에게 인정을 받은 것 같다.
대부분은 이 방식대로 살지 않겠지. 하지만 한 사람이라도 이렇게 사는 사람이 있으면 거창고등학교의 교육은 성공한 교육이라는 말을 27년 전 강당에 앉아서 들었다. 교육이 진짜임을 증명하는 것은 학생이다. 내가 그 한 사람이 되자.
함께 자라기
이번 수련회의 큰 기쁨 중 하나는, 스텝으로 함께했던 06또래 친구들이다. 작년엔 고3 학생이었는데, 이젠 동료가 되어 함께 수련회를 만들어간다. 낮은 자리에서 여기저기 발로 뛰며 어린 동생들을 섬기는 모습에 가슴이 뭉클했다. 프로그램 중간중간마다 여기저기 뛰어다니며 아이들을 이끄는 모습이 이렇게 이뻐 보일 수가… 최근 한두 달 사이에 부쩍 성장한 것 같다. 중간중간 짬 나는 시간에 했던 대화도 좋았다. 이 아이들, 이제 진짜 어른이구나.
청소년부 교사의 매력은 아이들이 자라 어른이 되어가는 과정을 함께 할 수 있다는 거다. 이 아이들의 성장 과정을 함께하며 나도 자란다. 가르치고 배우는 관계를 넘어 함께 성장하는 시간이 소중하다.
존경하는 은사님이 하신 말을 빌려 선생의 자세를 가다듬어본다.
" 좋은 선생은 학생인 것 같습니다. 다만 나이 든 학생. 약간 경험을 더 갖고 있는 학생. 그런 학생으로 살아가는 것. 그것이 좋겠습니다. “
이 사진에 있는 모든 사람, 함께 했던 시간.
아름답게 기억되길!
모두 감사하고 사랑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