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인의 성장

주님의 교회 청년 주일(성년식) 예배를 드리며

5월. 수줍게 피어있던 여린 이파리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짙은 초록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연둣빛이 예쁘다. 오랜만에 본 스무 살 친구들의 모습이 이랬다. 오늘 예배때 한 성년식 행사로 작년 고3이었던 우리 반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열아홉 땐 입 꾹 다물고 무게만 잡고 있던 아이들이 내가 알던 그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능글능글해졌다. 먼저 다가와 말을 걸고 낯간지러운 말도 한다. 예뻐지고 멋있어지고 말끔해졌다. 자신을 가꾸는 법도 배워간다. 이젠 마음을 표현할 줄도 안다. 청소년 티를 벗어냈다. 그야말로 청춘이다.

같은 날, 또 한 명의 청년을 만났다. 대학교 3학년을 보내고 있는 한 청년의 기도 제목을 받았다.

이게 어디 이 한 명의 기도 제목이랴. 고등학교를 졸업하고 오늘처럼 성년식을 치르고 성실하게 살아온 많은 대학교 3학년 친구들의 얼굴이 떠올랐다. 오늘 성년식을 치른 스무 살 친구들이 2년 뒤에 맞닥뜨릴 모습이기도 하다. 모두가 겪고 있는 삶의 무게다.

세상이 참 가혹하다. 하라는 거 다 했는데. 본분을 다하라는 말에 하고 싶은 것 참아가며 꾸역꾸역 살아왔는데. 갑자기 다음 길이 안 보인다. 뭘 하면 되는지 누가 알려주기만 하면 완벽하게 해낼 자신은 있는데. 정답지만 주어진다면 그걸 달달 외어서 잘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무도 그다음 얘기를 해주지 않는다. 정답지를 어디서 찾아야 할지 모르겠다.

2018년에 매일 변화하기라는 제목으로 글을 썼었다. 변화가 너무 빨라진 요즘 시대에 어떻게 나를 지켜가야 할지에 대한 글이었다. 지금 속도에 비하면 그때는 낭만적이었다. 지금은 정신을 못 차릴 정도다. 정신없는 속도에 온 세상이 길을 잃었다. 아무도 다음 길을 알려주지 않는다. 그걸 어떻게 찾을 수 있을까?

예쁘기만 하던 그 이파리에 비바람이 몰아치고 뜨거운 태양이 작열한다. 타죽을 것 같은 가뭄에 바짝 말라간다. 하지만 자연은 가만히 있지 않는다. 변화에 기민하게 반응하며 다음 길을 찾아간다. 가혹한 현실에 굴복하지 않고 끈질긴 생명력으로 다음 길을 낸다. 우리도 자연의 일부가 되어 자연스러워지자.

안정, 정답, 정석, 템플릿, 베스트 프랙티스. 이건 고정된 세상에서나 통하던 것이다. 머릿속에서 이런 건 지우자. 세상에 있지도 않은 정답지는 그만 찾고 현실의 문제를 들여다보자. 베스트 프랙티스의 자리에 ‘나’를 놓고 나의 다음 발걸음을 딛어보자. 혼란스러운 세상이 자유롭게 느껴지고 두려움이 가능성으로 변한다.

이런 세상에서는 정답을 맞추는 능력, 정석대로 따라 하는 능력은 그다지 중요하지 않다. 얼마나 성공했는지보다 중요한 것은 ‘얼마나 많은 실패를 했나?‘다. 얼마나 많이 넘어졌는지. 꼴찌를 해 봤는지. 쪽팔리고 부끄러움을 감당해 봤는지. 민망한 상황을 견뎌봤는지. 모든 걸 쏟아부은 걸 한순간에 날려 먹어 봤는지. 막막함을 겪어봤는지. 도대체 뭘 해야 할지 모르는 혼란을 참아내 봤는지. 아무것도 못 알아듣고 바보 취급을 받아봤는지. 무슨 말인지 하나도 못 알아듣는 회의 자리에서 마이크를 넘겨받아 병신 취급당하는 그 시간을 견뎌봤는지. 도저히 반박할 수 없는 지적에 얼굴이 화끈거리면서도 꾸역꾸역 그걸 해나갔는지. 기라성 같은 사람들 앞에서 가슴 졸이며 조무래기 같은 나를 드러내 봤는지. 심장이 쪼그라드는 가슴 쫄깃한 상황을 넘겨봤는지. 이런 숱한 실패를 너무 많이 겪어서 일상으로 받아들일 수 있는지. 그러면서도 사랑하는 사람들과 웃으며 행복한 일상을 보낼 수 있었는지. 지금 시대에 쌓아야 할 스펙은, 이런 실패 경력이다.

세상은 내 생각보다 너그럽다. 학교 다니는 동안에는 평가받고 비교당하며 살아왔겠지만 이제 우리의 무대는 학교가 아니다. 세상은 나를 평가하지 않는다. 비교하지도 않는다. 그러니 나도 나의 행복을 성적순으로 줄 세우지 말자. 마음껏 꿈꾸고 거침없이 행동하며 나의 세상을 넓혀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