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원작으로 해서 만든 영화를 보면 대부분 실망했던 것 같다. 책에서 표현한 방대한 이야기를 영화가 담아내기는 쉽지 않다.
김영하 작가는 산문집 《보다》에서 그 이유를 얘기한다. 그의 표현으로는, 소설은 심리적으로 3차원이고 영화는 2차원이란다. 책을 읽을 때는 단어들이 말하는 것에 대해 상상력을 동원하며 능동적으로 읽는다. 그렇게 상상력이 활짝 열리면, 마치 자신의 인생인 듯 느끼며 책 안으로 들어가게 된다. 복합적인 사고와 통찰력을 총동원해서 책을 읽게 된다. 반면 영화는 수동적이다. 영화를 볼 때는 그 속에 흠뻑 빠져들지만, 극장 밖으로 걸어나오면 그동안 본 것을 잊어버리고 만다.
지난 주일. 아버지가 은퇴하셨다.
마지막 은퇴예배에 함께하진 못했고, 사진으로만 보아야 했다.
이제 목회 자리에서 내려오는 아버지의 모습은, 30대 중반 처음 목회를 시작하셨을 때의 모습 그대로셨다. 사람들이 가지 않는 시골 변두리 마을에서 목회를 시작하셨고, 마지막 모습도 여전히 그러하셨다.
우리는 한결같은, 변함없는 이런 단어보다 성장, 발전 이런 단어를 더 좋아한다. 세상은 시간이 지날수록 더 많아지고 더 커져야 한다고 얘기한다. 하지만 그건, 어느 한쪽 파이를 떼내어 다른 쪽에 같다 붙이는 제로섬의 싸움은 아닌지… 이런 시대에, 처음 모습을 마지막까지 그대로 지켜오신 아버지의 한결같은 삶이 자랑스럽다.
수학적 사고.
이 말을 문자 그대로 풀어보면, 생각(思考)을 수학적으로 한다는 말이다.
“생각"이라는 건 사람이라면 누구나 하는 것이고, 그걸 수학적으로 한다는 건 그냥 생각의 방식을 말하는 것이다. 근데 “수학적 사고"라는 이 말은 많은 사람들에게 그리 편한 말은 아니다. 그건, “사고” 앞에 붙은 “수학적"이라는 말 때문이다. “수학"이란 존재가 편하지 않기 때문에, “수학적 사고"라는 말도 괜히 어렵게 느껴진다.
그런 의미에서 이 책은 수학의 난해함 대신 사고하는 방식에 초점을 두고 있다. 누구나 늘 하는 생각, 그 생각을 수학적으로 한다는 것.
예전 아프리카를 여행할 때,
시꺼먼 흑인 무리에게 차에 실려 이상한 곳에 끌려가 보기도 했고,
카메라를 훔쳐간 녀석들을 찾아가 도둑맞은 내 카메라를 찾아오기도 했었다.
여러 일을 겪었지만, 사람이 무섭지는 않았다.
진짜 무서웠을 때가 있었는데, 밤에 숲에서 길을 잃었을 때다.
해 질 무렵, 아름다운 경치에 감탄하며 그냥 걷고 있었는데 날은 금방 어두워졌고 주위를 둘러보니 깜깜한 숲 속이었다.
왼쪽으로 갔다. 한참을 걸었는데, 왠지 느낌이 이상하다.
다시 방향을 반대로 틀었다. 계속 걸었다. 걷고 또 걸었다.
지안이는 자전거를 탈 때마다 어깨를 잡아달라고 한다.
이미 충분히 쌩쌩 달리 수 있는 실력인데, 처음 시작할 땐 꼭 아빠에게 잡아달라고 한다.
난 그냥 어깨에 손을 살짝 올려놓을 뿐인데 거기에 안정감을 느끼나 보다.
어깨에 살짝 닿은 그 손에서 느껴지는 안정감.
‘나중에도 아빠의 그 손을 기억해줄까?’ 라는 생각이 들었던 그 순간, 나도 내 어깨에 닿았었을 아빠의 손을 기억 못 하고 있더라.
지안이도 당연히 기억하지 못하겠지?
지난주에, 오랜만에 올리브(橄榄城)에 갈 일이 있었다.
2016년 처음 중국 왔을 때 딱 1년 살았던 곳인데, 거의 5년 만에 갔다.
한동안 교회 고등부에서 2분 스피치를 했었다.
반별로 돌아가면서 했었는데 아래 3가지에 관한 이야기를 친구들 앞에서 나눠야 한다.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따뜻했던 기억 지금까지 살면서 가장 차가웠던 기억 앞으로 하고 싶은 것 아이들의 소중한 이야기를 듣는 시간이 참 좋다.
가끔, 2분 스피치에 대한 소감을 얘기하는 친구들이 있다.
아이들이 생각보다 진지하게 해서 놀랐다고 얘기하기도 하고,
너무 대충 준비한 것에 살짝 후회되기도 한단다.
나에 대해 생각해보는 시간이 흥미로웠다고 이야기하기도 한다.
많은 아이들이 가장 차가웠던 기억과 가장 따뜻했던 기억에서 “사람"을 얘기했다.
34년 전 초등(국민)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야ㅡ 내가 너보다 더 빨라”
“아니야 내가 더 빨라”
“난 오토바이 보다 빨라”
“난 차보다도 빨라”
“어휴~ 차보다는 당연히 빠르지”
1988년의 초등학교 1학년들. 정말 허세 쩐다.
근데, 지안이가 밥 먹으면서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아빠, 우리 반 OO는 오토바이보다 빠르대~”
“그래? 차보다는”
“어휴~ 차보다는 당연히 빠르지”
아ㅡ 똑같구나. 여전히 허세에 쩔어있는 2022년의 초딩들.
근데, 어른이 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허세를 부리고 싶은 대상이 달라졌을 뿐이지….
어느 날 지인이 나에게 해 뜨는 사진을 보내왔다.
그것을 본 나의 첫 생각. “어쩌라고” ㅋ
그 일출 사진은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있다. 그 사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는 해가 떠오르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벅차올랐을 테고, 그 마음을 함께 나누길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까지 사진에 담아서 전달하기는 쉽지 않다.
사진작가는 그걸 하는 사람인 것 같다. 피사체의 모습을 그대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봤던 그 순간의 느낌, 감정, 생각, 즉 그만의 이야기를 사진에 담아서 전달하는 것일 테다.
어제 고등부 친구랑 젬베 연습을 했다. 오랜만에 젬베를 치고 있다는 그 자체가 너무 신이 나고 행복했었다.
소리 일정한 리듬을 반복적으로 두드린다.
손바닥의 통증은 곧 소리가 된다.
그 소리는 손바닥을 타고 몸 안으로 들어온다.
손바닥과 젬베 가죽이 부딪히면서 일어나는 공간의 미세한 떨림이 피부에 와 닿는다.
젬베 소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와 닮아있다.
마치 내 심장의 소리를 듣는 것 같다.
소리를 온몸으로 느낀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 안으로 쑥 들어가 내가 있는 공간과 하나가 되어 온몸으로 나의 세상을 즐기고 만끽하는 모습이다.
이게 맞는 걸까? 저게 맞는 걸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늘 혼란스럽다.
하지만 혼란은 그냥 혼란으로 끝나지 않는다.
혼란은,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해준다. 익숙하게 해오던 방식대로 하던 게 더 이상 익숙하지 않고 어색해질 때, 혼란스럽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본다. 이렇게 다양하게 시도하고 실패해 보면서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곧 삶의 기회로 연결된다. 다양한 경험을 해 볼 수 있는 기회.
처음엔 작은 씨앗처럼 발견되었을 그 모습이, 여러 차례 시도(경험)를 통해 자라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