꿈 시리즈 세번째 글
꿈 시리즈 세 번째 글이다.
2019년에 처음으로 나의 꿈에 대해 글을 썼다. – 꿈
2022년에 [하이데어]에서 대화를 신청한 친구가 꿈을 실제로 어떻게 실현하고 있는지를 물어봐서, 그 질문에 대한 답으로 이 글을 썼다. – 꿈을 가지고 살아가기
이제, 다음 이야기를 써야 할 시점이 되었다.
유목민으로 살아가기
북경을 떠나기 전 마지막 고등부 수련회. 목사님께 요청했다.
“마지막으로 아이들에게 해주고 싶은 이야기가 있어요. 저에게 한 시간만 시간을 주세요.”
나의 삶을 돌아보며, 앞으로의 삶을 다짐하며. 사랑하는 고등부 친구들에게 마지막으로 해 줄 이야기를 한자 한자 적어 내려가며 참 많이 울었다.
그리고 그 강의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 ‘유목민으로 살아가기’
작년 10월에 중국 코스타에서 강사로 설 기회가 주어졌다. 눈을 반짝이며 빼곡히 모여 앉은 몇백 명의 청소년들 앞에서 한 강의도 ‘유목민으로 살아가기’였다.
강의 준비로 글을 쓰며, 중얼중얼 강의 연습을 하며 유목민의 삶은 다른 누구에게가 아니라 나 자신에게 새겨졌다. 그리고 그건 내 삶의 방식이 되었다.
유목민의 삶. 그건 불안함을 견디는 것이다. 비교하지 않고 경쟁하지 않고 묵묵히 자기 길을 가는 삶이다. 변화를 제어하려 들기보다 받아들이고 수용한다. 널찍한 길을 뒤로 하고 좁은 길로 발걸음을 돌린다. 멈추지 않고 나만의 속도로 계속 움직인다. 광대한 세상 앞에서 나의 초라함을 알지만, 나의 가능성 또한 무시하지 않는다. 그래서 겸손히 하나님을 의지한다. 주변의 이벤트에 열려있고 다가오는 사람을 환대한다.
거룩한 불안정감(Holy Insecurity)
하이데어를 시작하고 일 년 반이 지난 작년 여름, 진짜 광야가 시작되었다. 회사 돈이 바닥났다. 직원들 월급을 주기 위해 일을 만들어야 하는데, 태어나서 처음으로 영업이란걸 해야 했다. 세 시간 정도 진행되었던 첫 미팅을 끝내고 나오자 다리에 힘이 쫙 풀려 털썩 주저앉았다. 웃으며 대화를 나눴지만, 상대의 입에서 구체적인 다음 플랜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도록 끌어내야 했고 의미 있는 계약이 이루어져야 했다. 화기애애한 대화 속의 팽팽한 긴장감. 그렇게 겨우 첫 번째 계약을 만들어내고 직원들 월급을 내보낼 수 있었다. 하지만 그것도 딱 두 달 치, 그다음 일을 또 만들어내야 했다. 겨우 다른 고객사를 찾아 계약했고 월급날 며칠 전에 선금이 들어왔다. 난 여기에 ‘만나 프로젝트’라고 이름을 붙였다.
이집트에서 나와 광야에 들어선 이스라엘 백성들은 매일 만나를 먹으며 살아갔다. 예전엔 만나를, 은행에 큰돈을 맡겨두면 따박따박 나오는 이자 같은 거로 생각했다. ‘아니, 매일 자고 일어나면 먹을 것이 쌓여있는데 왜 걱정을 하지?’ 그게 아니었다. 그들은 오늘 만나를 먹으면서도 내일을 걱정했다. 내일도 먹을 것이 있을까? 혹시 내일은 만나가 없으면 어떡하지? 그렇게 가슴 졸이며 하루하루를 살았을 것이다. 그렇게 아슬아슬한 매일을 40년 동안 이어왔을 것이다. 하지만 그들을 하루도 굶지 않았음은 물론이고, 옷이 해어지지도 않았고 신발도 떨어지지 않았다. 불안함 속에 있을 때야 말로 안전한 하나님의 품을 경험할 수 있었다.
매번 처음 하는 것 같은 신앙생활
여전히 만나 프로젝트를 이어간다. 늘 불안하다. 지금까지 인도하신 하나님을 생각하면 이 아슬아슬함에 적응될 만도 한데, 불안함으로 조마조마 한 마음을 안고 하나님께 기도한다.
왜 신앙은 익숙해지지 않을까? 분명 힘든 상황에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경험하며 그 상황을 잘 통과했던 경험이 여러번 있는데. 이정도 했으면 적응될만한데. 익숙해지지 않는다. 매번 처음 하는 것 같다. 힘들게 버티다가 조마조마한 마음으로 하나님께 기도한다. 하나님 없으면 큰일날 상황을 겨우 지난다. 마치 이걸 처음 해 보는 것 처럼.
어느날 기도하면서 ‘그래서 다행인건가?’ 생각했다. 하나님께 기계처럼 반응하는 로보트가 아니라, 매번 처음처럼 엎드릴 수 있는게 오히려 감사하겠다 싶었다. 이런게 초심을 지키는 거겠지. 유목민으로 생존한다는게 이런건가. 어딜가든 처음 가보는 곳. 장소을 옮길때마다 이전의 경험이 쓸모없어지는. 그래, 내가 바라는 삶이 이런 거였지.
‘왜 신앙생활은 매번 처음 하는 것 같을까?’
이 말이 좋아졌다. 이런 상태가 좋다.
신앙이 자란다는건 어떤걸까? 잘 모르겠다.
그냥 하나님과 가까이 있고 싶은 마음 뿐이다.
그건, 기도 시간을 늘리고 말씀을 더 많이 보고,, 이런류의 말이 아니다.
아프리카를 여행할때 하나님과 가까이 있다고 느꼈다. 하나님과 나 사이에 무슨 막이 있다고 한다면, 만약 그런게 있다고 해 본다면. 그 막이 얇다고 느꼈었다. 하나님과 나 사이를 가로막고 있는게 별로 없는. 특별히 하나님을 찾지도, 의식하지 않아도 좋았다. 온전히 신뢰했고 그 안정감을 기쁨으로 즐겼다.
그냥 그 상태로 존재하고 싶다.
매번 처음 하는 것 같은 신앙생활. 익숙해지지 않아서 얼마나 다행인가. 오히려 익숙해지면 큰일난다. 신앙생활이 익숙하다는 말은 나의 좁은 틀 안에 갖혀있다는 말. 그게 말이되나? 하나님이 나의 패턴 안에서만 일하신다는게.
하나님의 일하심을 예측할 수 없다. 그래서 힘들다. 내가 마주하려는 하나님과 나와의 차이가 힘듦의 크기다. 그러니, 얼마나 힘들겠어.
지난 금요일 기도하며 ‘영원하신 하나님’이란 말이 큰 위로가 되었다. 하루가 다르게 뒤바뀌는 삶 속에서, ‘영원’의 크기로 다가오시는 하나님. 주일날 민정샘 문자에 ‘성실하신 하나님’이라는 글자가 있었다. 미친듯이 변화하는 세상에서 영원하고 성실하신 하나님이 나에게 다가온다. 그 하나님과 더 가까이 있고 싶다.
불안함 속으로 뛰어들기
실패하는 예수
이 글을 써내기 위해 삼다를 했었나 싶을 정도로, 여기에 나의 신앙 고백을 담아냈다. 나의 하나님을 내 말로 써내려 갔고 그건 나의 다짐이 되었다.
“우리가 여기 온 이유가 바로 그것이잖아요. 생각을 실행하는 것.”
『그리스인 조르바』에서 이 글귀를 읽으며 다시 마음이 꿈틀거렸다.
2022년 12월, 중국 생활을 접고 한국으로 들어왔다. 난 왜 갑자기 한국행을 결정했을까?
때론 그 이유를 나중에서야 알게 된다. 그 당시엔 진짜 이유를 모른다. 그냥 그때의 ‘구실’일 뿐이다.
‘생각을 실행하는 것’ - 이게 진짜 이유에 좀 더 가까운 말인 것 같다.
생각한 것을 실행할 수 있다는 것. 그것 만으로도 신나는 일이다.
조르바는 계획했던 모든 일이 실패하고, 춤을 춘다. 정말 순간에 충실한 사람이다.
불함함을 맞써는 방법은 순간을 사는 것일까? 사탄은 일어나지도 않은 미래에 대한 걱정으로 우리를 공격한다. 미래는 믿음의 영역이다. 믿음의 영역을 관리하려 할때 걱정이 틈탄다. 걱정은 불안함을 만들어내고 믿음의 자리를 차지해버린다.
그러므로 내일 일을 위하여 염려하지 말라 내일 일은 내일이 염려할 것이요 한 날의 괴로움은 그 날로 족하니라 (마태복음 6:34)
내일이 내일로 있을때는 불안함이 커진다. 변수가 너무 많다. 그 변수를 다 고려해야 하고, 변수의 가능성만큼 불안함은 커진다. 하지만 내일이 오늘이 되었을때, 불안한 내일이 그대로 현실이 되는게 아니다. 오늘도 일하시는 성실하신 하나님 터치가 새로운 오늘은 만들어낸다. 걱정과 불안함이 만들어낸 엉성한 계획을 긴가민가 하며 여전히 불안한 마음으로 지나가는 것이 아니라, 성실하신 하나님이 만들어내신 오늘의 장은 나의 행동의 무대가 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