실패하는 예수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보시기에 좋았단다.

창조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하나님은 실패했다. 자신의 피조물에게 반역당했다. 어쩌면 예정된 실패였는지도 모른다. 그들과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면 사랑밖에 못 하도록 만들었어야지.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다. 실패가 보장된 길이다. 선악과도 그렇다. 뭐든지 맘대로 먹으라 해 놓고 딱 하나 그걸 먹지 말라니. 사람은 자유롭게 그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과일을 따 먹어 버렸다. 하지만 하나님은 기꺼이 실패할 수밖에 없는 판을 짜고 그 안으로 침투하신다. 반역을 반전으로 맞선 셈이다.

하나님의 방법은 이상하다. 어디로 튈지 모르는 피조물을 파트너로 임명한다. 혼자 다 해버리면 완벽할 텐데 굳이 자유분방하고 위험천만한 사람과 함께 한다. 최강 파트너를 믿지 못하고 배반하는 인간들. 하나님은 계속 실패한다. 심지어 인간을 지은 걸 후회하고 대홍수로 자신의 작품을 지우기도 한다. 믿음의 조상이라 불리는 아브라함과 그의 자손은 계속해서 하나님의 뒤통수를 친다. 가장 믿었던 ‘택한 민족’에게조차 배신을 맛보아야 했다. 믿는 도끼에 발등 찍히는 것도 유분수지. 그렇게 실패하고서도 계속 실패의 수를 던진다.

하나님의 아들 예수, 그 아버지에 그 아들이다. 시작부터 아슬아슬하다. 자신이 태어날 따뜻한 방 한 칸도 제대로 마련하지 못한다. 유복한 어린 시절도 없다. 심지어 한 나라 최고 권력자인 왕이 그 어린아이를 죽이려고 한다. 예수의 어린 시절은 도망자의 삶이었다. 대개 위인은 처음엔 숨어 지내다가도 혜성처럼 등장해 한순간에 떠오르기 마련이다. 예수도 유월절에 성전을 뒤집어 엎으며 화려하게 데뷔한다. 그걸로 주목 받는 덴 성공하지만 이슈 몰이에 그치고 만다. 세상을 좀먹는 바리새인, 서기관, 율법 학자, 종교 지도자들을 하늘에서 내려다보며 얼마나 이를 갈았을까? 벼르고 별러 그들 앞에 인간으로 직접 나타나신 하나님, 예수. 신랄하게 비판하고 몰아세우지만 딱 거기까지다. 아쉽게도 세상의 힘은 그들에게 있었다. 이기지 못할 거면 덤비지도 말았어야지. 그들의 높은 콧대를 꺾지도 못하고 오히려 자신이 죽임을 당한다. 그것도 가장 비참하고 수치스럽고 고통스러운 방식으로. 이처럼 완벽한 실패가 있을까?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크고 원대한 계획에 걸맞지 않게 예수는 손수 뽑은 제자 12명을 키워내는데도 실패한다. 그리고 아버지가 그랬던 것처럼 아슬아슬한 수를 던지고 하늘로 올라가 버린다. 아직 애송이 같은 11명의 제자에게 모든 것을 맡기고 자신은 떠난다. 그들이 아무것도 안 해버리면 어쩌려고.

교회사에서도 실패는 계속된다. 쫓겨나고 도망 다니고 얻어맞고 욕먹고. 꾸역꾸역 버틸 뿐 속 시원히 승전고를 울린 적은 별로 없다. 그러는 사이 사탄의 기술은 점점 발전한다. 더 지능적으로 더 교묘하게. 그 녀석들은 삐끗하지도 않고 성공을 이어간다.

하나님, 예수님, 교회의 숱한 실패로 세상은 기묘막측하게 돌아간다. 복음은 실패에서 싹을 틔웠다. 세상이 깜짝 놀랄만한 창의적인 방식으로. 가히 창조자 하나님을 닮았다고 할만하다. 이집트로 끌려간 노예가 그 거대한 제국의 이인자가 된다는 건 말이 안 된다. 갈대 상자에서 세상을 뒤바꿀 생명이 숨 쉬고 있을 거라고 누가 상상이나 했을까? 모든 것을 잃고 바벨론으로 끌려간 포로가 왕비가 되어 펼친 활약은 어떤가? 십자가가 온 세상을 구원해 낼 줄은?

실패가 주는 선물은 가능성이다. 실패의 자리에 뜻밖의 고유함이 싹튼다. 신박한 세상이 펼쳐진다. 실패하지 않으면 누구나 예상하는 일만 일어난다. 짜놓은 판이 뒤바뀌지 않는다. 잘 짜인 판 안에서 예상대로 흘러가는 세상은 답답하다. 하나님은 기계를 만드신 게 아니다. 실패를 통해 끊임없이 재창조되는 세상, 그걸 만드신 거다. 실패는 실패로 끝나지 않는다. 실패 후 내딛는 다음 스텝. 그 한 발짝이 세상의 축을 뒤흔든다. 누구나 예측하는 잘 짜인 판에 금이 가기 시작한다. 실패와 실패가 모여 성공이라는 견고한 성이 무너진다. 세상의 축이 움직인다. 그렇게 실패는 희망을 만들어낸다.

우리의 실패도 그렇다. 우리는 실패를 통해 혼란을 겪는다. 그것은 기존의 고정된 축을 뒤흔든다. 그 축은 왔다 갔다 하다 어디선가 자리를 잡는다. 그 자리가 본연의 모습에 좀 더 가깝다. 왜냐하면 처음의 견고했던 축은 내 것이 아니었거든. 실패를 통한 조율이 아니었다면 내 모습을 찾아갈 수 없었을 것이다. 그렇게 실패는 중심축을 이동시킨다.

나의 삶도 실패의 연속이었다. 2015년 말, 부푼 꿈을 안고 중국으로 갔다. 4년 후 코로나가 시작됐고 회사는 문을 닫았다. 그동안 애착을 가지고 해왔던 일은 쓰레기통에 버려졌다. 함께 했던 동료는 모두 한국으로 돌아갔다. 난 혼자 중국에 남아 생존 모드에 돌입했다. 200개가 넘는 이력서를 돌리고 50번이 넘는 면접을 보며 간신히 회사에 입사했다. 유일한 외국인 노동자로 살벌하게 일했다. 나 때문에 프로젝트가 망해간다는 소리도 들었다. 실패는 거기서 끝나지 않았다. 멀쩡한 비자를 실수로 날리고 그걸 다시 되돌려 놓는데 반년 가까이 걸렸다. 매달 출입국관리소를 찾아가 불법체류자 신세를 간신히 면하고 나면 아이의 학교 문제, 회사 문제, 집 문제 등 여러 일이 겹친다. 사업을 준비했지만 시작도 하기 전에 망했다. 쓰라리고 막막했다. 하지만 두려움을 받아들였다. 그곳을 시작점으로 삼고 다음을 이어갔다. 그 시기를 보내며 더 깊어졌고 더 자유로워졌다. 이제는 세상이 주는 무한한 가능성을 누리며 살아간다. 스스로 실패의 자리로 들어간다. 숱한 실패가 지금의 나를 만들었다.

실패투성이 세상이 진정 아름다운 세상이다. 각자가 역동적으로 살아가는 세상. 숨겨진 내면이 마구마구 드러나는 세상. 실패는 축복이다. 삶의 기회다. 하나님과 파트너가 되어 이 세상을 재창조해 나가는 과정이다. 가능성이 없다고 뻔하다고 그러면 안 된다고 말하는 견고한 세상을 향해 fuck you를 날리며 맘껏 실패하자. 거기서 다음 스텝을 딛어보자. 그 안에서 진짜 나다움을 맛보며 자유로울 수 있을 것이다. 실패의 자리, 그 빈 공간에서 마주하는 신박한 세상. 거기서 만나는 하나님은 더 친근하게 느껴질지도 모른다. 실패한 나의 모습은 바로 하나님의 모습일 테니까.

이쯤 되면 팔복에 하나를 더 추가하고 싶어질 지경이다.
“실패한 자는 복이 있나니 무한한 가능성을 보게 될 것이요.”

지금 실패하고 있나? 예수님을 따라가고 있다는 증거다. 남보다 더 많이 실패했나? 예수님을 더 많이 닮았다는 증거다. 최선을 다해 적극적으로 실패하자. 예수님을 닮아 온 힘을 다해 실패하자.


코다: 『욕쟁이 예수』 패러디

이 책을 처음 본 것은 12년 전쯤이다. 그때 받았던 충격을 지금도 잊지 못한다. 깜짝 놀랄 만큼의 발칙한 내용에 통쾌했고 속이 시원했다. 한국 교회의 답답한 분위기에 오랫동안 눌려왔던 난 한 줄기 빛을 보는 것 같았다. 이 책을 참 많이도 들춰보았고 여기저기 이 책에 대해 떠들고 다니기도 했었다. 그러다 이번에 이 책을 다시 읽게 되었다. 마지막 장을 덮고 아내에게 이렇게 얘기했다.
“내가 이 책의 영향을 참 많이 받긴 했나 보다. 어떤 부분은 내 생각인지 저자의 생각인지 구분이 안 될 정도네.”
그만큼 나에게 영향을 많이 준 책이다.

이번에는 이 책을 처음 접했을 때와 달라진 내 모습을 생각하며 읽었다. 처음 읽었을 땐 충격 그 자체였다면, 이번엔 여러 번 읽고 생각해 왔던 내용이 내 삶에 어떻게 나타나고 있는지 돌아보았다.

하나님 앞에서 체면이나 예의 따위를 차리기보다 더 솔직해졌다. ‘하나님의 뜻’의 범위를 제한하지 않고 나에게 허락된 많은 것을 누리면서 자유롭게 삶을 즐기고 있다. 불안한 삶을 기꺼이 받아들일 수 있게 되었다. 높은 자리에 올라가는 것 보다 이웃들과 함께하는 시간을 진심으로 더 좋아하게 되었다. 다양한 사람을 더 너그럽게 대할 수 있게 되었고 내 생각을 예의를 지키면서도 소신있게 말할 수 있게 되었다. 무엇보다 하나님을 편안한 존재로 받아들이고 좀 더 편안하게 사랑한다고 말할 수 있게 되었다.

하지만 아직도 소화하지 못한 부분이 많다. 생태학적 감수성은 여전히 부족하다. 나의 정치적인 모습은 아직도 입과 생각에만 머물러 있고 지역 사회엔 여전히 무관심하다. 나의 일차적인 필요만 채우는 소비 습관도 여전하다. 예수를 더 닮아가길 조용히 다짐해 본다.

오늘 교회에서 설교를 듣는데 머릿속에서 이 책의 여러 장면들이 스쳐 지나갔다. 그래도 예전보다 나아졌다고 느끼는 건, 이전보다는 다양한 메시지가 조금은 더 들리는 듯 하다. 더 많은 사람들이 제각각 다양한 하나님을 이야기하고, 그 이야기들을 수용할 수 있는 한국 교회가 되어가면 좋겠다.

나의 인생책이라 할 수 있는 『욕쟁이 예수』를 패러디 해서 이 글을 써 보았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