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순자 평전

출생

일제시대 말, 경북 의성에 살던 신재식은 결혼하고 만주로 갔다. 그곳에서 첫째 아들을 낳은 후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냈다. 해방 후 아내의 시신을 화장하고 유골을 통에 담아 아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박재익은 고향 마을에서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뱃속에는 아기가 자라고 있는데 남편은 풍토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아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신재식. 남편을 먼저 보내고 딸과 함께 남겨진 박재익. 두 사람은 새 가정을 이루었다. 1954년 가을에 다섯 번째 아이 순자가 태어났다.
“이년은 어디를 가도 대장질하지 끄트머리에 있지는 않겠네.”
순자의 외할아버지가 늘 했던 말이다. 순자는 늦은 출생신고로 56년생의 주민등록번호를 받았다. 또래 친구들보다 늦은 나이인 9살에 학교에 들어갔다. 입학하자마자 홍역을 앓아 3개월 동안 학교에 가지 못했다.

교회와 함께한 10대

11살때 경북 경주시 안강읍 노당리로 이사 왔다. 이웃마을 육통리에 교회가 있었다. 한 여전도사님이 자기 집에 “육통교회"라고 이름을 걸고 예배를 드렸다. 순자도 또래 친구들을 따라 교회에 갔다. 어차피 할 게 없는 꼬마애들이 교회에 가든 말든 무슨 상관이랴. 하지만 살림도 하고 농사일도 거들어야 할 나이가 되자 부모는 교회 가는 것을 못마땅하게 여겼다.

장맛비가 쏟아지는 여름, 교회에 갔다가 돌아오는 길이었다. 도랑을 건너다 미끄러졌다. 칼처럼 뾰족한 돌에 무릎이 찍혔다. 손가락이 들어갈 정도로 움푹 파였다. 동네 의사에게 가서 맨살을 그냥 꿰맸다.
“엄마, 아빠한테는 얘기하지 말아 주세요”
가뜩이나 교회에 가는 것을 싫어하는데, 교회에 갔다 오면서 다쳤다고 하면 못 가게 할 게 뻔했다. 상처가 너무 심해 일주일 동안 다리를 사용할 수 없었다. 그 일이 있은 후로 부모의 핍박이 시작됐다. 성경책을 숨기고, 불태웠다. 두들겨 맞기도 했다. 순자는 주일이 되면 기도했다.
‘돌아와서는 맞아도 되니까, 제발 집 밖으로 무사히 나가게만 해 주세요’
물을 길으러 가는 척하며 물동이를 메고 집을 빠져나와 그대로 교회로 가곤 했다. 깜깜한 새벽에 집을 빠져나와 새벽기도를 갔다 와서 밥을 지었다. 순자는 핍박이 너무 심해서 집을 나와버렸다. 남의 집에서 식모살이하며 맘껏 교회에 다닐 생각이었다. 새벽에 조용히 집을 나와 읍내로 갔다. 2~3km가 되는 거리를 걸어가던 중이었다.
“순자야!”
뒤에서 어머니가 뛰어 오셨다.
“집에 가자. 이제부터 교회 가지 말라는 소리 안 할게”
그 후로 마음놓고 교회에 갈 수 있었다.

여름성경학교때면 동네 아이들을 모아 교회로 갔다. 오전에는 아이들을 가르치고 오후에는 농사를 지었다. 저녁에는 다시 교회로 갔다. 아이들의 도시락을 직접 싸와서 먹였다. 남자아이랑은 제기차기를, 여자아이랑은 공기놀이를 하며 친구가 되었다. 예배시간에는 설교자가 되어 말씀을 가르쳤다. 순자에게는 교회가 전부였다. 교회를 가려면 잠시도 쉴 수 없었다. 더 많이 일해야 했다. 집안 살림도, 농사일도, 교회 일도 도맡아 했다. 농사일이 없을 때는 뜨개질로 돈을 벌었다. 그렇게 번 돈은 기도실을 짓는데 보탰다. 마을에 기도실이 생긴다는 기쁨에 달밤에 공사장에 가서 삽으로 터를 닦았다. 교회를 건축할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통 여자는 밑에서 허드렛일을 하고 남자가 지붕 위에 올라가 힘든 일을 하기 마련인데, 순자는 직접 지붕 위에 올라가 공구리를 쳤다. 사람들은 혀를 내둘렀다.

결혼

결혼을 해야 할 나이. 남편의 조건은 딱 한 가지였다.
“하나님. 저는 아무것도 필요 없어요. 예수 믿는 사람이면 됩니다. 십일조 하는 사람이면 됩니다.”
여기저기서 중매가 들어왔다. 천석꾼 집안과도 선을 봤다. 그런 건 중요하지 않았다. 선보러 온다 그러면 도망을 가기도 했다.
“저년이 교회에 다니더니 바람이 나버렸네”
이런 말도 들었다.

1977년 12월 29일 토요일. 장봉환과 12번째 선을 봤다. 그는 후줄그레한 마이에 슬리퍼를 신고 나타났다. 어깨엔 하얗게 떨어진 비듬이 보였다.
‘예수 믿는 사람을 만나게 해 주세요.’
하나님은 그 기도를 들어주셨다. 그 둘은 1978년 4월 25일에 결혼했다. 그때 순자 나이는 24살이었다.

남편은 8남매 맏이였다. 시동생 두 명과 시누이 다섯 명은 줄줄이 대학생, 고등학생, 중학생, 초등학생이었다. 위로는 시댁 어른을 모시고 아래로는 시동생들 도시락을 다 쌌다. 결혼 후 한 달 정도 지난 어느 날이었다. 순자는 새벽기도를 가려고 일어났다. 문 앞에 있는 요광에 소변을 보고 일어서는데 정신을 잃고 쓰러졌다. 연탄가스 중독이었다. 남편이 그것을 발견했다. 동치미 국물을 먹으며 겨우 정신이 돌아왔다. 새벽에 일어나지 않지 않았으면, 그때 연탄가스중독으로 생을 마감할 뻔했다. 결혼 첫해 추석에는 혼자 송편 5대를 쪘다. 추석 전날, 시누이들과 송편을 빚고 있었다. 그날은 넷째 시누이의 생일이었다. 시누이들은 송편을 만들다가 생일 파티를 하러 나갔다. 순자는 혼자 남아 송편을 만들었다. 임신한 채로 새벽까지 떡을 쪘다. 그해 겨울엔 250포기 김장을 했다. 정오부터 꼬박 12시간이 걸렸다. 임신 8개월 만삭인 몸으로 혼자 밖에서 떨며 김장을 담갔다. 겨울 시집살이는 유독 힘들었다. 시아버지 생일, 시할아버지 기일, 시할머니 기일이 음력 11월 16일, 11월 22일, 11월 23일 연달아 있었다. 그때가 되면 시고모 네 분을 비롯한 여러 친척이 와서 열흘씩 머무른다. 어르신들 밥을 차려내고 살림하고 장사도 하며 제대로 된 시집살이를 했다.

세 자녀 출생

첫째는 결혼 이듬해 음력 1월 17일에 태어났다. 이틀 전인 정월 대보름, 그날은 일요일이었다. 찰밥을 하라는 시어머니의 말에 새벽에 불을 지펴 찰밥을 만들고 교회에 갔다. 저녁예배는 너무 힘들어서 갈 수 없었다. 일요일 저녁에 혼자 집에 있는 건 처음이었다. 예배가 끝난 시간, 남편은 열 명이 넘는 청년을 집으로 데리고 왔다. 청년부 회장이었던 남편은 정월 대보름을 그냥 넘길 수 없었나 보다. 그들은 12시가 넘도록 집에 갈 생각없이 윷놀이를 하며 놀았다. 순자는 방구석에서 쭈그리고 앉아 기다렸다. 다음 날 아침 양수가 터졌다. 남편은 밖에 나가 있었다. 혼자 어떻게 해야 할지 몰랐다. 그 상태로 장사를 했다. 저녁까지 밥도 못 먹고 남편을 기다렸다. 남편을 보자마자 얘기했다.
“아무것도 못 먹었어요”
남편은 순자를 데리고 나가 식당을 찾았다. 이미 늦은 시간, 대부분 식당은 문을 닫았다. 어렵게 찾아 들어간 한 곳에는 매운 음식뿐이었다. 아무것도 먹지 못했다. 진통이 시작되었다. 시어머니와 함께 산부인과로 갔다. 배가 고파서 밤새도록 한숨도 못 잤다. 남편은 다음 날 아침에 나타났다. 그를 보자 눈물이 흘렀다.
“배가 너무 고파요”
남편은 바로 나가서 국밥 한 그릇을 사왔다. 후루룩 먹고 나니까 조금 힘이 났다. 9시 40분쯤 바로 출산을 했다.

첫째는 젖을 빨고 뱃속에는 둘째가 자라고 있다. 입덧이 심했다. 그때쯤 남편은 경주에 있는 국제관광공사에 입사했다. 남편은 청년부 회장을 할 때와 마찬가지로 회사 사람들을 자주 집에 데리고 왔다. 첫째 돌잔치 때는 회사 동료 40여 명이 집에 왔다. 순자는 임신 7개월의 몸으로 첫째 돌잔치 손님을 치르기 위해 직접 장을 보고 음식을 만들었다.

경주에 세명백화점이 들어섰다. 화장품, 속옷 가게를 백화점으로 옮겼다. 그러고 둘째를 출산했다. 남편 회사에서 주공아파트에 사택을 주었다. 순자의 여동생 정화가 함께 살며 장사를 도왔고 시누이 희영도 함께 살았다. 순자 부부와 두 자녀, 거기에 여동생과 시누이까지 6명이 한집에 살게 되었다. 둘째 돌잔치는 더 크게 치렀다. 첫째는 팔 남매 첫 손주여서 크게 치렀고, 둘째는 3대째 이어지는 장손이어서 더 큰 행사였다. 친지들과 잔치를 한번 치르고, 백화점 식구들, 회사 동료. 이렇게 3번의 잔치를 했다. 세명백화점은 장사가 잘 안됐다. 지인의 소개로 대구 동구 시장에 있는 점포를 싼 가격에 얻었다. 경주에서 출퇴근하며 장사를 했다.

1981년 겨울, 설날을 앞두고 배가 아파왔다. 첫째와 둘째는 고모네로 보내고 포항 선린병원으로 갔다. 병실이 없었다. 택시 타고 경주 김웅길 산부인과로 갔다. 거기엔 이불도 없었다. 의사도 없었다. 남편은 장사를 마감하고 늦은 시간이 되어서야 병원에 왔다. 떨고 있는 순자를 보고 집에 가자고 했다. 올 때도 택시를 타고 왔는데, 다시 택시를 타기가 미안했다. 순자는 시어머니, 남편과 같이 걸어서 집으로 갈 참이었다. 경주 기독교병원(현, 동산병원)을 지나는데 진통이 시작되었다. 집에까지 갈 수 있는 상황이 아니었다. 밤 11시쯤 다시 병원에 들어갔다. 시어머니는 남편에게 내일 출근해야 하니 집에 들어가라고 했다. 남편은 집으로 갔고 2~30분도 안돼서 셋째가 태어났다.

세 아이를 기르며 장사 하는 게 쉽지 않았다. 순자의 동생 정화가 장사를 도왔다. 경주에서 대구로 출퇴근을 하는 게 힘들었다.
“대구로 가자”
순자 식구 5명과 동생 정화 그리고 시누이 정숙. 이렇게 7명이 대구에 집을 마련해 같이 살게 되었다. 그때가 1982년 3월 10일이었다. 남편은 대구에서 경주로 출퇴근을 했다. 집 앞 버스정류장을 지날 때마다 슈퍼마켓에 많은 사람이 들락날락하는 것을 보았다. 누군가 내놓은 슈퍼마켓을 받았다. 시동생 의환이 일을 도왔다. 시동생과 함께 슈퍼마켓 일을 시작했지만, 그는 계속 함께할 수 없었다. 순자는 혼자 장사를 해야 했다. 아이 셋을 키우며 장사를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하나님, 제 목숨을 차마 스스로 끊지는 못하겠어요. 하나님이 그냥 저를 데려가셨으면 좋겠어요.’
막내는 할머니에게 보냈다.

목회 시작

1983년 5월, 출근 시간이 지났는데도 남편은 집에 있었다. 순자에게 말했다.
“손수건 40개 포장해라”
그걸 들고 회사에 가더니 3시에 돌아왔다.
“나 사표 냈다.”
순자는 혼자 장사를 하는 게 너무 힘들었다. 차라리 잘 됐다 싶었다.
“잘됐네요. 같이 장사 합시다.”
이어서 남편이 말했다.
“나 신학교 간다.”

남편은 이듬해 영남신학교 2학년에 편입했다. 집에는 책상을 놓을 자리도 없었다. 가게에서 공부를 했다. 낮에는 학교에서 수업을 듣고 돌아와서는 장사를 했다. 일을 마감하고 나서야 공부를 할 수 있었다. 책상에 앉으면 잠이 쏟아졌다. 순자는 새로운 제안을 했다.
“가게 접고, 하숙집을 합시다.”
하숙생을 2~3명 정도 받으면 어느 정도 벌이가 되리라 생각했다. 그러면 남편도 공부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구 경북대 동문 옆에서 하숙집을 열었다. 하숙생을 2~3명은 받아야 벌이가 되는데, 한 명만 들어오고 나머지 방은 비어 있었다. 나중에 알고 보니 그는 운동권 학생이었다. 본의 아니게 순자의 집은 운동권 학생들의 은신처로 사용되고 있었다. 대학교 옆에서 하숙집을 열었지만, 아무도 들어올 수 없도록 손이 써져 있었다.

그때 남편은 교회를 개척할 장소를 알아보고 있었다. 성서공단의 노동자를 보며 그곳에서 교회를 시작하기로 했다. 순자는 남편을 말렸지만 그는 확고했다. 순자는 금식 기도를 하던 중 마음이 움직였다. 성서공단에 있는 한 상가 건물 지하에 계약했다. 직접 수리도 하고, 인테리어도 하며 예배당을 만들어갔다. 하숙집을 내어놓았는데 집이 나가지 않았다. 그날도 순자는 남편과 같이 예배당을 수리하고 있었다. 그러던 중 집으로 가야겠다는 마음이 불일 듯 일어났다. 집에 간 지 5분도 안되어서 누군가가 집을 얻으러 왔다. 그렇게 집이 나가고 잔금을 치를 수 있었다. 그때가 1985년 8월이었다.

다음달 9월 둘째 주. 달구벌교회 창립 예배를 드렸다. 순자와 남편은 시간만 나면 밖으로 나가 전도를 했다. 나갈 때마다 온종일 담 밑에서 떨고 있는 두 아이를 보았다. 기홍이와 선애였다.
“우리 선교원 합시다. 저 아이들 점심은 먹일 수 있겠어요.”
그 해 12월, 선교원을 하기로 하고 선생님을 구했다. 다음해 1월, 경주대 학생이 선생님으로 지원했다. 그 학생은 유야교육에 미술까지 전공했다. 집집마다 원아를 모집하러 다녔다. 공짜로 미술까지 가르쳐준다고 하니 아이들이 모였다. 3월 3일 23명의 아이가 입학했다. 그 선생님은 다음날 나타나지 않았다. 병설유치원에 취직이 되었단다. 유치원 선생님을 하다가 임신으로 휴직 중인 셋째 시누이 친구가 많이 도와주었다. 나중에는 직접 선교원 선생님 자리를 맡았다. 국민학교밖에 나오지 못한 순자는 선교원 살림부터 운영까지 뒷일을 다 감당했다. 이듬해에 48명, 그다음 해엔 70명, 그리고 100명 이상으로 늘어났다.

남편의 40일 금식기도

88올림픽이 한창이던 날, 남편은 40일 금식 기도를 하러 산으로 들어갔다. 처음 몇 번은 설교를 하러 왔다. 금식 기도를 끝내고 몸을 회복할 때까지 설교를 할 수 없었다. 수요예배는 순자가 직접 인도를 했지만 주일 설교까지 차마 할 수 없었다. 순자는 매주 설교할 사람을 찾아야 했다. 어느 주일날, 여기저기 전화를 해도 설교자를 찾을 수 없었다. 발을 동동 구르고 있는데 서진구 전도사가 와서 설교했다. 토요일까지는 선교원을 운영했다. 직접 봉고차를 몰며 아이들을 등하원 시키고, 점심도 해 먹이고, 시장에 나가 교구재 준비도 하고, 청소까지 하고 나면 녹초가 된다. 그렇게 정신없이 한 주를 보내다 보면 어느새 주일이다. 설교자가 없는 교회에 사람들이 몰려온다. 너무 힘들어서 남편이 기도하고 있는 곳에 따지러 갔다. ‘나 힘든 건 괜찮은데 교회는 어떡하라고요’ 이 말을 할 참이었다. 굶고 있는 남편을 보니 차마 입을 열 수 없었다. 바위에 올라가 실컷 울었다.
“나는 집에 안 갑니다. 설교할 사람도 없고, 못 가겠어요.”
“그래도 애들이 있는데 가야지. 서진구에게 편지 보내 놨다.”
순자는 울면서 집으로 왔다. 기도한다고 엎드렸는데 전화벨이 울렸다. 서진구 전도사였다. 울면서 전화를 받았다.
“어딥니까?”
서진구는 예수원 공동체에 들어갈 계획이었다. 그 전에 대구에 있는 누나 집에 겨울옷을 가지러 왔다가 전화를 한 거였다. 울며 어디냐고 묻는 순자의 말에 바로 교회로 왔다. 서진구의 도움으로 예배를 이어갈 수 있었다.

40일 금식 기도를 끝낸 남편은 겨우 몸을 회복하고 돌아왔다. 이제 신대원 준비를 해야 하는데 공부할 시간도 장소도 없었다. 월암동에 예배당 한 채, 사택 한 채를 지어 이사를 했다. 건물 두 채를 교회 집사님 두세분이서 뚝딱 지어 올렸다. 그 집에서 친구들과 합숙을 하며 공부를 했다. 합격했고 그 이듬해부터 서울에 공부하러 다녔다. 월요일 아침에 기차를 타고 서울로 가 금요일 밤에 돌아왔다.

순자는 15인승 봉고차에 20명 가까이 되는 아이들을 태우고 다녔지만 면허증이 없었다. 공부하는 남편 뒷바라지를 하며 선교원을 운영하느라 필기시험 공부할 시간이 없었다. 시험 전날 커피를 한 대접 마시고 공부를 해도 쏟아지는 졸음을 참을 수 없었다. 필기시험에 다섯 번 만에 붙었다. 기능 시험은 더 어려웠다. 봉고차를 몰고 골목길, 논길을 요리조리 잘 다녔지만 기능시험장의 코스 운전은 달랐다. 면허증도 없는데, 토요일 새벽 1시 40분까지 동대구역으로 나가 서울에서 내려오는 남편을 태우고 집으로 돌아왔다. 월암동 뒤는 와룡산이다. 교도소에서 죄수들이 탈옥해 와룡산에 숨어들었다는 뉴스가 종종 들렸다. 투견꾼들이 싸움개를 먹이면서 훈련하는 곳도 있었다. 그런 곳에서 한밤중에 아이 셋만 집에 남겨두고 혼자 차를 몰고 나가려니 무서웠다. 막내 재휴가 물었다.
“엄마도 귀신이 무서워요?”
귀신이 아니라 사람이 무서웠다. 한밤중 여자 혼자 나가는 걸 알고 갑자기 사람이 나타나 버리면 어떡하나… 1년 동안 그 생활을 했다. 남편이 방학이라 집에 있을 때 집중해서 면허 시험 준비를 했다. 87년에 도전한 운전면허증을 89년이 되어서야 손에 쥘 수 있었다. 시험 14번만이었다.

대전 삼성교회

남편의 신학교 동기 최OO. 그는 아이들에게 관심이 많았다. 그에게 달구벌교회와 선교원을 맡기고 대전으로 목회지를 옮겼다. 남편은 대전 삼성교회 교육전도사로 부임했다. 1989년 12월 27일 수요일, 순자의 가족은 대전으로 이사를 했다. 아이들도, 주변 사람들도 하나같이 이야기했다.
“달구벌 교회를 이렇게 놓고 가버리면 어떡해요?”

대전으로 이사 온 첫날, 다같이 수요예배에 갔다. 예배는 8시 좀 넘어서 마쳤는데 이어지는 교역자 회의는 10시가 넘도록 끝나지 않았다. 순자와 아이들은 남편이 나오길 기다렸다. 10시를 훌쩍 넘겨서야 식당을 찾아갈 수 있었다. 어느 술집에서 다섯 식구가 둘러앉아 해장국을 먹었다. 이사 온 첫날의 식사였다. 그날 밤 꿈을 꿨다. 연탄을 갈려고 아궁이 뚜껑을 열었는데 불씨가 꺼져 있었다. 자세히 보니 저 아래에 불씨가 약간 남아 있었다. ‘아ㅡ 어려움이 있겠구나.’ 한쪽에는 고양이 한 마리가 죽어 있었다. ‘아ㅡ 정말 어렵겠구나.’ 기차길 옆에 있던 그 집은 너무 추웠다. 두 달도 안돼서 이사를 했다.

남편의 교역자 생활은 쉽지 않았다. 다른 교육전도사가 세명 있었는데, 혼자 출신이 다른 남편을 따돌리고 잘못을 뒤집어씌우기 일쑤였다.
“딴 데로 가자. 여기서는 못하겠다.”
남편은 다른 곳으로 가려고 했다.
“이런 어려움도 못 이기면 무슨 목회를 하겠어요? 난 못 갑니다”
순자는 으름장을 놓았다. 순자는 아이 셋을 학교로 보내놓고 온종일 기도했다. 그렇게 일주일을 기도만 하며 보냈다. 담임목사는 동료 전도사들이 남편에게 누명을 씌웠다는 것을 알았다. 그 후로 남편은 담임목사와 짝이 되어 사역을 재밌게 해 나갔다.

하동 화심교회

1990년 겨울, 고향 선배 장OO 목사가 전화했다.
“하동 화심교회에 목회자가 없는데 올래?”
“네, 가겠습니다.”
순자는 남편과 함께 어떤 곳인지 보러 갔다. 대전에서 버스를 타고 구례로 가 기차로 갈아타고 하동으로 가는 길이다. 첩첩산중이 이어진다. 눈물이 줄줄 흘렀다. 화심교회에 가 보니 온 성도가 모여 사택에 벽지를 바르며 새로운 목회자를 맞이할 준비를 하고 있었다. 그 모습에 마음이 열렸을까? 1991년 2월 하동으로 이사를 했다. 화심교회에 가보니 집사 한 명과 중학생 몇 명이 주일학교 교사를 하고 있었다. 남편은 전부다 교사를 시켰다. 평생 배농사만 짓던 사람들을 모아 신나게 목회를 했다.

경주 충효교회

고향 경주에 있는 교회에서 연락이 왔다. 성도와 목사 사이가 안 좋단다. 한 무리의 성도가 교회를 떠나 있는데 새로운 목회자가 오면 돌아오겠단다. 가기로 했다. 화심교회에서는 난리가 났다. 한 명 한 명 겨우 달래고 이사 준비를 하던 어느 날, 경주 충효교회에서 전화가 왔다.
“이사 못 오게 되었습니다.”
시찰장이 못오게 한단다. 없던 일로 하잖다. 무슨 꿍꿍이가 있는 듯했다. 이미 마음을 정하고 화심교회에서도 떠날 준비를 마쳤다. 남편은 이야기했다.
“나는 갑니다. 그러면 시찰장 집 마당에 이삿짐 풀겠습니다.”
경주 충효교회의 장로 세 명 서OO, 오OO, 이OO는 새벽에 하동으로 순자 가족을 데리러 왔다. 1993년 2월, 그렇게 경주로 갔다. 첫째 인애는 중3, 둘째 재운은 중1, 셋째 재휴는 초등학교 6학년이었다. 경주에는 인애와 재운이 전학 갈 학교가 없었다. 자리가 비어야 전학을 갈 수 있단다. 경주에는 재휴만 데려갔고, 인애와 재운이는 하동에 남겨뒀다. 그 둘은 박광명 집사 집에서 생활하며 중학교에 다녔다. 한동안 그렇게 지내다가, 서라벌여자중학교에 3학년 자리가 생겼고 월성중학교에도 1학년 자리가 생겼다. 그제야 다섯 식구는 한 집에 모이게 되었다.

그해 3월에 남편은 목사 안수를 받았다. 그리고 교회 건축 준비를 했다. 충효교회는 논밭에 둘러싸인 시골 마을에 있었다. 마을에서 1.5km 떨어진 지역은 아파트 단지로 지정되어 아파트가 들어서고 있었다. 모두가 그 곳에 건축하기 원했다. 어느 날 남편이 얘기했다.
“막내 재휴 교육보험으로 들어놓은 500만원, 그거 건축헌금으로 드리자”
순자는 그럴 수 없었다. 그 돈이 어떤 돈인데. 추위와 배고픔을 참아가며 악착같이 모은 돈이었다. 그것만큼은 자식 교육을 위해 남겨두고 싶었다.
“나는 못하겠어요.”
말은 그렇게 했지만 기도를 했다. ‘목사님이 하자고 하시는데, 반대하면 안 되겠다.’
가정예배를 드리며 남편은 재휴 교육보험을 해지하고 헌금하겠다고 이야기했다. 첫째가 펄쩍 뛰었다. “아빠, 그건 안 돼요!” 둘째도 얘기한다. “안됩니다.” 순자가 아이들을 달랬다. “엄마도 처음엔 그런 마음이었다. 하나님이 하신다. 돈으로 공부하는 거 아니다.”
막내 재휴는 15만 원을 건축 헌금으로 작정했다.
“재휴야 무슨 돈으로 헌금할래?”
“2년 치 세뱃돈 그대로 모으고, 용돈 하나도 안 쓰고 모으면 15만 원 할 수 있어요.”
그렇게 8천만 원이 모였다.

임OO 권사가 순자를 찾아왔다. 아파트 신축 부지에 건축하지 말고, 지금 이 마을에 건축하도록 남편에게 대신 얘기해 달란다.
“저는 지금까지 목사님 하자고 하시는 일에 한 번도 반대하지 않고 순종했습니다. 전 그 말 전할 수 없습니다.”
그는 충효교회를 세운 서OO의 어머니였다. 그 집안이 교회의 주인 행세를 하고 있었다. 아파트 단지로 교회를 옮기면 새로운 사람이 많이 올 테고, 그러면 주인 행세를 더는 못하게 된다. 그 가정은 교회 건축을 방해하기 시작했다. 어떤 방해에도 흔들리지 않자 그들은 소란을 피우며 교회를 떠났다. 순자와 남편은 매일 놀이터 옆에 비어있는 부지에 가서 “놀이터 옆, 이 땅을 주세요"라고 기도했다. 몇몇 집사님들도 함께했다.

시골 교회에서 8천만 원을 모은 것은 엄청난 일이었지만, 건축하기엔 턱없이 부족했다. 남편은 각 교회에 공문을 보내 상황을 알리고 도와달라고 했다. 서울에 큰 교회를 찾아다녔지만 가는 곳마다 문전박대를 당했다. 담임목사는 커녕, 부목사도 만나지 못했다. 관리인에게 막혀 돌아와야 했다. 서울 영암교회가 40주년 기념으로 예배당을 지어줄 교회를 찾고 있었다. 남편은 영암교회에도 찾아갔다. 1994년 영암교회 중역들이 경주에 놀러 왔다. 충효교회에서는 직접 쑥을 캐서 정성껏 떡을 쪄 대접했다. 남편은 그들 앞에서 이 지역의 비전과 교회의 역할에 대해 브리핑을 했다. 그들은 서울로 올라가 경주 충효교회 예배당을 함께 짓기로 했다. 문제가 생겼다. 땅을 계약하려면 단지 조합장의 직인이 필요한데, 교회 건축 문제로 소란을 피우고 나갔던 이들이 방해했다. 조합장에게 압력을 넣어 도장을 찍어주지 못하게 했다. 영암교회에서는 최종 결정을 내리려고 하는데, 그러기 위해선 건축을 한다는 증명이 필요했다. 적어도 건축할 땅 계약은 해야 했다. 결정 전날까지 조합장의 도장을 받지 못했다. 교회 집사들이 조합장을 찾아가 힘들게 설득해 겨우 도장을 받아 계약했다. 94년 6월에 기공예배를 드렸고 공사가 시작되었다. 순자는 오전 참, 점심, 오후 참, 모든 음식을 직접 해서 공사판으로 날랐다. 나중에는 전 교인이 함께 벽돌을 날랐다. 충효교회는 그렇게 지어져 갔다.

소란을 피우고 교회를 떠났던 서OO는 목수였다. 남편은 교회 의자를 그에게 맡기자고 했다. 그 가정에게 돌아올 문을 열어 주자는 거였다. 성구사에 가면 장의자 하나에 8만 원에 맞추는데, 훨씬 비싼 돈을 주고 서OO에게 교회 의자 제작을 맡겼다. 알고 보니 그 가정은 교회에 안 가고 있었다. 남편이 서OO을 찾아가 얘기했다.
“서로 할 이야기가 많겠지만, 아무 말도 하지 맙시다. 다시 함께 합시다”
다시 한 교회에서 신앙생활을 했다. 아파트가 들어서면서 충효교회엔 새로운 사람들도 많아졌다.

장기기증

1998년 어느 날, 교회에서 헌혈 행사를 했다. 사랑의장기기증운동본부에서 헌혈 차를 몰고 와 교인들 헌혈도 하고 함께 예배도 드렸다. 장기기증본부의 목사가 설교를 했는데, 설교 중에 이런 말을 했다.
“충효교회 장봉환 목사님이 신장을 기증하기로 했습니다.”
순자는 깜짝 놀랐다. 아이들도 깜짝 놀랐다. 무슨 일이 있었던 걸까?

남편은 심부전증 환자 병문안을 가게 되었다. 그는 그게 어떤 병인지도 몰랐다. 건강한 사람의 신장을 받아야 낫는단다. 그제야 생각났다. 교회 건축 비용을 마련하려고 서울의 큰 교회를 찾아다닐 때였다. 스무 군데 넘게 찾아가도 문전박대만 당했다. 차마 이대로 돌아갈 수 없었다. 남편은 기도원으로 갔다.
“교회를 건축할 수 있다면 제 눈이라도, 제 장기라도 바치겠습니다.”
그제서야 그 기도가 생각났다. 그 환자의 아들이 고향을 방문했고, 고향 교회에 왔다고 인사를 하러 왔다. 남편은 그에게 자신의 신장을 기증하겠다고 말했다. 그는 남편의 손을 붙잡고 울었다.
“우리도 못하는 일을…”
말을 이어가지 못했다. 이어서 장기기증 절차를 밟았다.
“저희 어머니는 몸이 약해서 수술할 수가 없습니다. 체력도 약하고 합병증 때문에 장기 이식 수술을 못합니다.”

남편은 장기를 기증하기로 약속했으니, 장기기증본부에 전화를 걸어 의사를 밝혔다. 1999년 4월 1일, 광주 전남대병원에서 남편의 신장 하나가 다른 이의 몸으로 옮겨졌다.

마지막 목회

충효교회에서는 우여곡절이 많았지만 성도만 보며 목회했다. 마지막 3년은 재밌었다. 2005년에 성주 도흥교회로 목회지를 옮겼다. 성도들은 이사 가는 날까지 찾아와서 “안됩니다"라고 말했다. 도흥교회에서 뜻하지 않게 은퇴를 하게 됐다. 2013년 4월 27일이 마지막 예배였다. 이사할 때마다 가지고 다녔던 책을 다 처분했다. 남편은 주차빌딩에서 일했고 순자는 동생 정화와 같이 식당을 했다.

어느날 남편 친구 목사에게 전화가 왔다.
“지금이라도 목회지 있으면 갑니까?”
“있으면 가야죠”
안동 오대교회 목회자 자리가 비어있었다. 남편은 그 주 주일에 설교하러 갔다. 집에 오는 길에 전화가 왔다.
“만장일치로 결정되었습니다. 바로 이사 오세요.”

순자는 식당을 비우는 게 마음에 걸렸다. 달구벌교회에서부터 함께 했던 김OO에게 자초지종을 설명했다.
“목사님이 목회하러 가신다는데 당연히 도와드려야죠.”
안동에서 선물처럼 다시 목회의 자리가 주어졌다. 그리고 2022년 4월에 은퇴를 했다.

신순자 여사는 어느새 70 인생을 살았다. 지금은 경북 영천시 화남면 신화로에서 텃밭을 가꾸며 여생을 보내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