내 삶을 오케스트레이션 하기

대곡역에서 출발하는 서해선. 텅빈 지하철이 들어온다. 보이지 않는 자리 쟁탈전, 위치선정이 중요하다. 문에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간발의 차로 다른 사람이 앉았다. 얼른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빈자리가 눈에 들어왔는데, 이미 늦었다! 다른 사람이 막 앉아버렸다. 아침부터 참 정신없다. 아ㅡ 맞다! 오늘 내 생일이지.

지난 삼다 독회때 보미님 글이 인상적이었다. 죽음을 편안하게 말하더라. 나의 장례식에 올 조문객에게 들려줄 글을 쓰고 그때를 위한 음악을 선곡하고. 나의 존재를 죽음이 어찌할 수 없다는 강함이 느껴졌다. 존재한다는 건 뭘까. 몸은 죽었지만, 나의 이야기가 남아서 사람들에게 들려지고 있다면, 그게 계속해서 영향을 주고 있다면. 여전히 존재하는걸까? 그렇다면 두려워해야 할 것은 죽음이 아니라 삶이다. ‘젊음은 낡은 것이고 늙음은 새로운 것이다’ 와~ 어떻게 이런 표현을 만들어내지? 이미 많이 회상해 본 낡은 젊음,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한 새로운 늙음. 오늘도 새롭게 늙어간다.

잃은 것에 대한 슬픔, 다시 올 것에 대한 기대. 이 두가지는 짝이다. 뭔가를 잃어버리면 빈 공간이 생기고 거긴 새로운 것으로 채워진다. 어디에 주목할 것인가는 나의 선택이다. 주위에 흩뿌려져 있는 슬픔과 기대의 요소. 거기서 손에 잡히는 걸 주워담아 나의 하루를 만든다. 선택한 것을 모아 조율하며 삶을 이뤄간다. 얼마전 동료들에게 도커 컨테이너 환경을 얘기하며 오케스트레이션(Orchestration)에 대해 얘기했었다. 이 단어는 지휘자를 연상시킨다. ‘관리’라는 오염된 말보다 ‘조율’이라는 부드러운 느낌을 준다. 위, 아래로 나누기보다 공존하고 함께하는 느낌이다. 좋고 나쁨의 프레임은 그 순간에 가치를 판단해버린다. 좋다가도 나쁠 수 있고, 나쁘다가도 좋을 수 있고, 그 중간 어디쯤에서 왔다갔다 할 수도 있다. 섣부른 판단을 거두면, 나에게 주어진 삶의 많은 요소로 내 삶을 가꿔 갈 수 있다. 지난주 읽었던 “감옥으로부터의 사색”. 신영복 선생님이 20년동안 감옥에 있으면서 쓴 글이다. 그 좁은 곳에 갖혀 있으면서도 내 삶의 주인 자리를 내주지 않고 자신의 삶을 이어간다. 좋고 나쁨의 프레임을 없애고, 나에게 주어진 삶의 요소로 내 삶을 만들어간다. 어떻게 그럴 수 있을까? 배우고 싶다.

저 자리에 앉았으면 무엇을 했을까? 출근하며 들고나온 “듣기의 말들”을 읽었겠지. 그것도 좋았겠다. 서 있는 지금도 좋다. 이런 글을, 이런 생각을 캐 낼 수 있으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