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와 함께 살아가기

인터넷의 등장으로 세상이 빨라졌다. 아이폰이 나오면서 모바일 세상이 시작됐다. 좀 지나자 너도나도 클라우드 얘기를 꺼낸다. 아무데나 ‘빅데이터’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고,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로 사람을 조급하게 만든다. 1년 전 ChatGPT가 나왔다(정확히는 13개월 전). 열기가 사그러드나 싶더니 생성형AI 열풍을 몰고 왔다. IT와 관련이 없는 사장님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다. 왜 이리 호들갑이야?

변화는 늘 있었다. 돌을 갈아서 농사를 짓던 시절에도 다른 도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여파로 세상은 변해왔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나는 4차 산업혁명을 이렇게 정의했다.
“늘 있었던 세상의 변화가 매우 빠른 속도로 진행되는 것”
그걸 혁명이라 부르는 이유는, 그 속도가 정신을 못 차릴 정도이기 때문이다.

미래는 어떤 모습일까? 영화에서처럼 기계와 사랑을 나누는 일이 실제로 벌어질까? AI가 사람의 일자리를 빼앗아 갈까? 나 역시 개발자의 자리를 내어주어야 할까? AI는 판타지일까, 공포의 대상일까?

ChatGPT를 시작으로 베일에 싸여있던 인공지능 시대가 도래했다. 많은 사람이 예측하는 미래 이야기에 어지러울 정도다. 여기에 내 생각도 보태본다.

새롭게 주어진 시간, 어떻게 사용할 것인가?

나는 ChatGPT를 부사수로 두기로 했다. ‘똑똑하지만 어리버리한 신입사원’으로 이 녀석의 위치를 정하고, 리더의 자리에서 관계를 맺어간다. 그것이 시간을 단축해준다. ChatGPT를 효과적으로 쓰는 방법에 관심이 쏠린다. 프롬프트 엔지니어라는 새로운 직무도 생겼다.

ChatGPT를 어떻게 사용하느냐보다 중요한 것이 있다. 그래서, 새롭게 주어진 시간을 어떻게 써야 할까?

‘예전엔 이거 하는 데 1시간이나 걸렸는데, ChatGPT를 쓰니까 10분 만에 끝나버렸다!’

여기에 대한 반응:

  1. 나머지 시간은 놀아야겠다.
    ⇒ 내가 할 일을 기계에 맡기고 아무것도 안 한다. 이건 기계에 자리를 빼앗기는 꼴이다.
  2. 이걸 5번 더 할 수 있겠다. 돈을 더 벌자.
    ⇒ 기계가 짜 놓은 판에 톱니바퀴로 들어가는 일. 스스로 노예가 되는 것이다.
  3. 나에게 50분이 새로 주어졌다. 이 시간을 다르게 써보자.
    ⇒ 내가 하던 일을 기계에 넘겨주고 다른 걸 해 볼 수 있다.

기계가 잘하는 것은 기계에 맡기고 그 시간에 기계가 할 수 없는 걸 해 보자.

그럼에도 스스로 해야 하는 게 있다

많은 개발자가 ChatGPT로 코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ChatGPT가 그림도 그린다. 시도 쓰고 소설도 쓴단다. ChatGPT가 다 하면 될 것 같다. 뭐가 문제일까?

난 코드를 작성하며 문제의 실체를 본다. 간과했던 부분을 발견하고 더 깊은 곳으로 들어간다. 이걸 반복하다 보면 나만의 시각이 생긴다. 문제가 정의된 문장을 보면 그 이면에 숨겨진 이야기가 보인다. 동시에 연관된 사람이 떠오르고 이슈가 예상된다. 그 한 문장이 불러올 변화가 연상된다. 그건 현재의 작업에 영향을 준다. 생각 속의 미래와 조밀하게 상호작용하며 진도를 나간다. 코드를 작성하는 행위에는 결과물을 만들어내는 것 이상의 무언가가 있다. 글을 쓰는 것도 마찬가지다. 글을 쓰는 건 결과물을 만들어내기 위해서만이 아니다. 글을 쓰면서 나를 돌아본다. 생각을 캐낸다. 나도 모르는 나를 발견한다. 한 글자씩 써 내려갈 때마다 그 글자가 다음 글자를 불러온다. 어느새 나도 모르는 이야기가 만들어져 있다. 이렇게 나를 발견하고 성장해간다.

ChatGPT는 나의 성장을 배려하지 않는다. 결과물에 초점을 맞출 뿐이다.

내 자리 못뺐는다

기술이 변하면서 일자리가 없어지는 건 늘 있었던 일이다. 우편배달, 신문 배달, 이런 일은 이제 없다. 좀 더 앞 시대를 생각해보면 지게꾼, 인력거꾼, 장돌뱅이, 이런 직업도 사라졌다. AI의 등장으로 일자리가 변하는 건 자연스러운 일이다. 단지 그 속도가 빠를 뿐.

앞으로 몰아칠 변화가 꽤 클 것으로 예상한다. 그건 말 그대로 ‘변화’다. 진보, 발전이 아니다. 더 나아지는 게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 변해갈 뿐이다. 세상이 유토피아가 되진 않을 거라는 얘기. 어떤 모습으로 바뀌든 문제는 남아 있을 테고,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할 일은 여전히 존재할 것이다. 그게 우리가 할 수 있는, 해야 하는 일이다.

선택의 기준

우리는 늘 선택의 기로 앞에 놓인다. 어떻게 결정을 내려야 할까? ‘무엇이 나에게 유리한가?‘를 따져보고 더 유리한 상황을 선택하겠지. 그러면 될까?

미래를 예측해보고 유리한 선택을 하는 것은 지금 시대에 어울리지 않는 방식이다. 이 전 세상에서나 통했던 방식이다. 지금은 변화의 속도와 크기가 너무 커져서 미래를 가늠할 수가 없게 되었다. 예측이 어려워졌다. 유리해 보이는 것을 쫓아가는 삶은 위험하다. 내가 바라보았던 그 상황도 변할 텐데, 상황에 초점을 맞추다 보면 거기에 파묻히고 만다. 한때 유리했던 그게 나의 발목을 잡게 된다. 경력이 쌓일수록 점점 뒤처지는 아이러니한 상황이 벌어진다.

무엇을 선택하느냐보다 더 중요한 것은 ‘어떤 삶을 살 것인가?‘에 대한 나만의 대답이다. 이게 명확하다면 상황이 주는 유리함과 불리함은 미미해진다.

선택의 기로에서 이런 질문을 해 보자.
‘저 상황이 줄 것 같은 유리함은 사라질 거야. 그럼 난 어떤 경험을 해야 할까?’
예를 들면,

  • 대학 졸업장, 학점, 각종 수상 경력이 쓸모없어진다면, 난 대학생활 동안 뭘 해야 할까?
  • 우리 회사가 2년 후에 없어진다면, 난 여기서 뭘 해야 할까?
  • 우리 아이는 공부 못하는 아이가 될 거야. 앞으로도 공부를 잘하게 될 가능성은 없어. 그럼 이 아이는 학교생활을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

이때 나오는 대답이 본질에 좀 더 가까운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