불안한 세상을 가르치자

어제 오후에 그리고 저녁에 두번의 만남을 가졌다. 나까지 포함해서, 어제 만난 세명의 공통점 — 코로나때 직장을 잃었다.

지난주 어머니 평전을 쓰며, 지금 ’전태일평전‘을 읽으며, 이전에 읽었던 소설 ’한강‘을 떠올리며, 그리고 나(우리)의 삶을 보며 든 생각:

안정적인 삶이 보장되던 시대는 없었다. 전쟁때 태어난 부모님 세대도 그랬고, 일제시대에 태어나 전쟁을 겪은 그 이전 세대도 그랬고, 일제시대를 살던 그 이전 세대도 그랬고, 조선이 망하는 걸 보았던 그 이전 세대도 그랬다. 그 이전 세대도 마찬가지였을 듯. 역사를 통틀어 ‘안정된’ 삶이 보장되었던 시대가 있었던가? 지금까지 한 번도 그런적이 없었는데, 지금이 뭐가 특별하다고 그걸 바라는 걸까?

어쩌면 그건 신기루일 수 있다. 잡히지 않는 꿈. 착취의 도구로 사용되고 있는지도 모른다. 고분고분 현실에 순응하고 말 잘 듣는 노예로 길러내는 수단.

힘든 건 이런 거다. 안정적일 거라 생각했던 내 삶이 기대와 다르게 불안정해질 때. 그때 오는 상실감, 박탈감, 실패감. 4~50대가 되면 어딘가에 자리 잡고, 일정한 금액의 돈을 따박따박 받으며 아늑한 가정을 이루고, 한 번씩 여행도 다니는 삶이 셋팅되어 있을거라 생각했을 텐데. 막상 그 나이가 되어보니 기대와는 전혀 다른 현실.

그런 삶은 없다. 혼란과 불안함을 떠안고 살아야 하는 게 진짜 삶이다. 다 그렇게 살았다. 부모님 세대도, 할아버지 세대도, 그 이전 세대도. 또 그 이전에도.

그럼 아이들한테 뭘 가르쳐야 할까?

어릴 때 주산/암산 학원이 여기저기 생겨나는 걸 봤다. 그 기술을 익히면 은행에 취직해서 안정되게 살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이 퍼져있었다. 지금 주산은 어디에서도 사용하지 않는다. 지금도 마찬가지, 세상은 아이들에게 이 시대의 주산을 가르치며 안정된 삶을 기대하게 만든다.

안정된 삶 같은건 없다는 걸 가르쳐야 한다. 혼란스럽고 불안함 속에서 꾸역꾸역 살아가는 모습을 보여줘야 한다. 실패하고 넘어져도 다시 정신 차리고 일어서서 내 삶을 일궈내는 걸 보여줘야 한다. 그 안에서도 이웃과 함께하며 소소한 기쁨을 누리며 사는 삶을 보여주어야 한다. 너의 삶도 혼란스러울 거고 불안할 거란 걸 알려주어야 한다. 그런 삶도 살만하다는 걸 알게 해야 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