중국에서 배운 것: 1) 생존법

오늘, 한국에 들어온지 딱 1년이 되는 날이다. 북경에서의 시간을 다시 회상해본다.
돌아보니 중국에 있으며 아래 3가지를 배운 것 같다.

  1. 생존법
  2. 사람에 대해
  3. 나 자신에 대해

괜히 연말 분위기에, 지난 시간을 돌아볼 겸 각각에 대해 한편씩 글을 써 볼까 한다.


‘재미있으면 쭉 살고, 재미없으면 돌아가지 머’

처음에는 가벼운 생각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중국 생활이 7년이나 이어질 줄이야…

2015년 12월에 중국에 왔다. 아내가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새로운 곳에서 살아보는 것도 재밌겠다 싶었다. 주재원 임기가 3년이니 재미없으면 임기만 딱 끝내고 돌아오면 될 테고, 재미있으면 그냥 내가 돈을 벌면서 거기서 쭉 살면 되겠지. 우리 부부는 이제 17개월 된 딸을 데리고 북경으로 갔다. 나는 아내가 주재원으로 발령받은 회사에 현지 채용으로 입사를 했다. 한 명을 주재원으로 보냈더니 나까지 ‘원 플러스 원’으로 그 회사로 가게 되었다. 아내는 주재원 임기를 마친 후 퇴사를 했고, 그 후부턴 나 혼자 일을 하면서 중국 생활을 했다.

2020년 1월, 중국 우한에서 시작된 코로나가 중국 각지로 퍼지고 있었다. 중국땅 안에는 있으면 안 되는 분위기였다. 대부분의 외국 회사에서는 직원들을 당장 본국으로 귀국시켰다. 2월 1일, 우리도 그 분위기에 일단 한국으로 들어왔다. ‘잠시 지나면 괜찮아지겠지. 사스도 잘 지나갔잖아.’

한국에 잠시 들어간 나에게 회사 소식이 들려왔다. 문을 닫기로 했단다. 결정은 끝났고, 회사를 어떻게 청산해야 할지 논의하는 단계였다. 80여 명의 직원 있었고 더군다나 중국 입장에서는 외국회사였으니, 안 그래도 자국 민에 대한 보호가 강한 중국에서 80여 명의 중국직원의 거취문제를 문제없이 해결해야 했다. 2월 28일, 난 그 사실을 알고 중국으로 다시 돌아왔다. 여전히 코로나가 잡히지 않은 상황이라, 일단 나 혼자만 중국으로 들어왔고 가족들은 3주 후에 오기로 했다.

2020년 3월 15일은 특별한 날이다. 우리 가족의 운명을 결정지은 날이다. 아내는 3월 21일에 북경에 들어오기로 예약되어 있었던 비행기를 3월 15일로 변경했다. 이유는 단순했다. 아내는 대한항공을 선호했는데, 운항이 중단되었던 대한항공이 다시 운항을 시작하면서 대한항공으로 변경한 것이다. 대한항공을 선호하는 이유도 단순했다. 입출국 공항이 집에서 가깝다는 이유로. 대한항공은 북경의 T2 공항과 한국의 김포공항을 왔다갔다했고, 아시아나는 북경의 T3 공항과 한국의 인천공항을 왔다갔다했는데. T2 공항과 김포공항이, 한국에서도 북경에서도 집에서 가까웠다. 그리고 아시아나는 이른 아침(8시)에 출발하는 데 비해 대한항공은 10시쯤, 좀 더 여유 있는 시간에 출발한다. 그 단순한 이유로 3월 15일 대한항공으로 변경했다.

3월 15일 날 말도 안 되는 괴상한 법이 발표되었다. 중국으로 입국하는 모든 사람은 지정된 숙소에 가서 2주간 격리 생활을 해야 한다는 것이다. 그 법안은 아내가 비행기를 타고 있을 그 시간에 발표되었는데, 그걸 보고 난 가슴을 쓸어내렸다. 하루만 늦었으면, 수용소에 가서 격리당할 뻔 했다. 3월 15일, 난 아내와 딸을 만날 수 있었다.

그때 많은 한국 사람들이, 이건 말도 안 되는 방침이라며 비행기를 뒤로 연기했다. ‘임시로 이렇게 하는 거겠지. 설마 쭉 이러겠어?’ 근데 그 방침은 갈수록 심해졌다. 격리 기간은 2주에서 3주로 늘어났고, 나중에는 비행기 운행도 중단되었다. 조금씩 비행기 표를 뒤로 미루던 사람들은, 아예 중국으로 들어올 길이 막혀버렸다. 그러다 비자가 만료되었고, 중국은 갈 수 없는 나라가 되어버렸다. 많은 사람이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중국 생활을 정리해야 했다. 사업체를 운영하는 사람들, 주재원들, 식당을 운영하는 사람들,, 이런 사람들이 잠깐 한국에 들어갔다가 졸지에 10년이 넘게 일궈왔던 삶의 터전을 잃어버렸다. 내 주위에도 그런 사람이 많았는데, 30년이 넘도록 중국에서 고향처럼 살던 사람도 있었다. 중국에 있는 집에 생활하던 물건이 그대로 있었는데, 이웃들의 도움으로 간신히 짐을 한국으로 받을 수 있었다. 나도 여러 이웃의 집을 정리해주었다.

그 하루 차이로 많은 한인의 운명이 결정되었다. 3월15에 중국에 있었던 사람은 중국에 남을 수 있었고, 그때 중국을 떠나 있었던 사람들은 본인의 의지와 상관없이 중국 생활을 정리해야 했다. 우리 회사 사장님도 꿈을 품고 중국으로 와 15년 동안 회사를 꾸려왔었고, 이제 다음 스텝을 준비하고 있었는데, 모든 걸 잃어버렸다.

우리 가족의 운명도 그 하루 차이로 바뀌었다. 비행 일정을 변경하지 않았더라면 아내와 딸도 비행기를 계속 연기 했을 테고, 그러다 비자도 끝났을 테다. 난? 회사는 문을 닫기로 했기 때문에, 중국에 남아있을 이유가 전혀 없었다. 우리 가족의 중국생활도 거기서 끝이 날 뻔했다. 근데 우리 가족은 말도 안 되게, 그 시기에 중국에 있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3월 15일을 생각하면 아찔하면서도 기쁘다. 난 그 후 꽤 한동안(1,2년이 지나도록) “으~ 3월 15일”이라고 말하면서 가족들을 힘껏 끌어안곤 했다. 진짜 어쩔뻔 했어.

그렇게, 거기서 끝나버렸어도 전혀 이상하지 않았을 중국생활이 두 번째 시즌으로 이어졌다. 코로나로 중국 문은 굳게 닫혔고, 회사는 망했고, 난 곧 실업자가 될 운명이다.

회사 청산 작업은 생각보다 쉽지 않았다. 회사 청산 팀이 꾸려졌다. 이들이 찾은 방법은 회사를 매각하는 거였는데, 이 일이 잘 진행 되지 않았다. 회사를 매각하려면 미팅도 여러 번 해야 하고 실사도 하고, 이런저런 절차를 거쳐야 하는데, 코로나로 움직일 수가 없다. 한국에 있는 담당자들이 중국으로 들어와야 하고, 중국 회사에서도 실사를 나와야 한다. 중국 각 지역 간의 왕래도 막혀서 회사 청산 절차가 쉽게 진행되지 않았다.

내가 첫 번째로 한 일은, 회사는 매각되더라도 ‘우리 팀은 살려보자’였다. 우리 회사를 인수해가는 회사는, 뛰어난 팀을 흡수하기 위해 전략적으로 인수하는 게 아니라, 망한 회사를 헐값에 사들이는 거다. 우리 직원들은 찬밥 신세가 될 게 뻔했다. 뿔뿔이 흩어져 개처럼 일할 게 뻔했다. 그들에게 우리 팀이 매력적으로 보이면, 우리팀을 유지하게 해 주지 않을까? 그러면 좀 더 괜찮은 대우를 받으며 그 회사로 이동할 수 있지 않을까? 난 남아있는 동료와 함께 지난 4년간 해 오던 일을 다듬어서, 우리만의 강점을 드러내 보이려고 했다. 실력 있는 팀이 좋은 제품까지 가지고 있으면, 우리의 대우가 달라지지 않을까? 난 우리 팀에 대한 자부심이 있었다. 낙심한 동료 한 명 한 명 찾아가 설득했다. 이렇게 망연자실해 있지 말고 할 수 있는 걸 해 보자고. 물론 대부분은 회의적이었다. 이미 망한 회사에서 뭘 할 수 있냐고. 내가 이들을 위해 해 줄 수 있는 게 그거라고 생각했다. “이건 회사의 지시는 아니야. 이미 망한 이 회사엔 지시를 내릴 사람도 없어. 그냥 마음이 움직이는 사람이 하는 거야”. 서툰 중국어로 한 명 한 명 만나 설득했고, 나의 진심이 통했던 친구들도 있었다. 내가 구심점이 되었고, 나와 함께 하는 사람들이 몰렸다. 그러던 중 한국에서 한 형님이 전화로 얘기했다. “장재휴, 정신 차려. 쓸데없는 일 하지 말고 너 먹고살 걱정이나 해!”

맞다. 회사는 이미 망했는데, 나 혼자 그걸 받아들이지 않고 있었다. 어항 안의 물고기를 꺼내 바다에 풀어놓아도 익숙해진 어항의 반경을 벗어나지 않는다고 했던가? 내 모습이었다. 회사의 일은 회사가 존재할 때 필요가 있는 거지. 내가 만든 결과물을 사용할 회사가 존재할 때야 그게 쓸모가 있는 거지. 회사라는 껍데기를 치워놓고 보니, 내가 하는 그 일은 세상에 아무 필요가 없었다. (나의 직업윤리에 하나가 보태졌다. “세상에 도움이 되는 일을 하자”) 난 일하는 관성에서 벗어나지 못하고 있었다. 엔진은 이미 꺼졌는데, 그걸 자각하지 못한 나는 혼자 이전과 같은 삶을 이어가려고 아둥바둥 하고 있었다. 어쨌건 그런 나는 정신을 차리게 되었다. 그래, 나 먹고살 방법이나 찾자!

두번째 시도. 나와 비슷한 처지의 한국인이 3명 있었다. 우리 세 명에게 안 좋은 소식이 전해졌다. 우리 회사를 인수할 중국 회사가 정해졌는데, 외국인은 받지 않는단다. 괜히 주주들에게 설명할 일을 만들고 싶지 않다는 것이다. 셋 다 중국에 남기로 작정한 터여서 우린 어떻게든 방법을 찾아야 했다. 우린 사업을 준비했다. 지난 4년간 했던 일 중에서 다른 회사에도 통할(?) 수 있는 아이템을 찾았다. 중국 이커머스 시장의 독특함과 그 안에서 우리가 했던 비즈니스 방식을 다른 회사에도 적용할 수 있게 만들어 그걸로 사업모델을 만들어 사업을 시작해 보려고 했었다. 다른 파트너 업체를 찾아 함께 일해야 했다. 두 명은 상해로 넘어가 파트너 업체와 고객사를 찾았고 나는 북경에서 사업 아이템을 준비했다. 그렇게 얼마간 준비의 시간을 보냈다. 제품도 윤곽이 나왔고 파트너 업체도, 고객사도 정해졌다. 나도 상해로 가서 함께 할 사람들을 만났다. 모두가 함께 모인 자리, 우리 눈엔 그들이 동료로 보이지 않았다. 사기꾼처럼 보였다. 그날 밤 우리 셋이 모였을 때 얘기했다. “그 사람들 우리 파트너 아니에요.” 우리의 사업은 시작도 하기 전에 망했다. 우리 셋은 각자 자신의 길을 가기로 했다. 형님 한 분은 한국으로 들어갔다. 또 한 명은 2살 아래 동생이었는데, 이 친구는 아직 결혼하지 않은 솔로였다. “우리 어떻게든 버티자. 버티는 사람이 이기는 거야” 우리는 각자의 방식으로 살아남자고 했다.

난 본격적으로 취업시장에 뛰어들었다. 200개가 넘는 이력서를 돌렸고 면접도 50번 넘게 봤다. 많은 사람이 나에게 외국계 회사에 일자리를 알아보라고 했다. 아무래도 중국 로컬 회사보다는 외국계 회사가 환경도 괜찮고 외국인인 나에게 좀 더 유리하지 않겠냐고.. 난 중국 회사를 고집했다. 이유인즉슨, 난 회사가 망한 이유를 나에게 돌렸다. 물론 회사가 망한 건 그 누구의 문제도 아니었고, 경영자들의 복잡한 이해관계에 의해서였다. 하지만 난, 우리가 만들어 낸 제품과 팀이 매력적이었다면 그런 결정을 내리지 않았을 거라 생각했다. 중국에 왔는데 내가 중국을 잘 몰랐구나. 중국에 왔으면 중국식으로 살아야 하는데, 내 맘속엔, ‘그래도 한국이 낫지 않아? 중국보단 미국이 더 낫지?’ 이런 생각이었다. 그런 나를 반성했고, 제대로 중국을 경험해보기로 결심했다. 난 계속해서 로컬회사의 문을 두드렸다.

난 중국어를 잘 못한다. 오랫동안 준비를 해서 중국에 간 것이 아니라, 갑자기 기회가 생겨 가게 되었고, 중국에 와서 중국어 공부를 처음 시작했다. 게다가 첫 회사는 한국회사라서 통역을 도와주는 친구들이 있었다. 중국어를 못해도 별 지장이 없는 환경이었다. 중국어 실력은 늘지 않고 그냥 대충 의사표현만 하고 사는 것에 익숙해져 버렸다. 그런 내가 선포했다. “일단 한 방 맞고 와야지. 나 다음 주에 면접 보러 갈 거야” 그러고 다짜고짜 이력서를 돌렸고 연락이 오기를 기다렸다. 면접은 전화로 시작되었는데, 첫 면접을 보고 ‘나 바본가?’ 싶었다. 이렇게 무시를 당할 수가.. 하긴, 말도 제대로 못 하는 사람이 어떻게 일을 하겠어? 면접을 볼 때마다 바보취급을 당하고 왔다. ‘이미 중국이 세계를 선도하고 있는데 우리가 왜 한국사람을 뽑아야 하죠?’ 라는 말도 들어야 했다. 다행인 건, 횟수가 거듭될수록 조금씩 똑똑한 바보가 되어가고 있었다. 근데, [채용담당자-지원자] 이런 면접 구도는 나한테 무조건 불리했다. 실력은 둘째치고 말에서 밀려버리니 어떻게 나를 드러낼 수 있겠어? 난 이 면접 구도를 바꿔야 했다.

그러다 재밌게 일하는 한 스타트업 회사를 찾았다. 그 회사 대표한테 전화가 왔는데, 또 면접구도에 말려들어 갈 분위기다. 난 지금 당장 찾아가겠다고 했다. 그렇게 그 회사 대표와의 면접이 시작되었다. 난 만나자마자 소개고 뭐고 다 때려치우고 질문 공세를 퍼부었다. 무슨 회사인지? 지금 어떤 서비스를 준비하는지? 왜 나를 뽑으려고 하는지? 어떤 고민이 있는지? 그 친구는 준비하고 있는 서비스의 기획서를 보여주며 이제 시작할 프로젝트를 설명하기 시작했다. 기획서를 함께 보며 꼼꼼하게 질문했고 내 의견도 주고받았다. 그렇게 2시간 정도 대화 나누다가, 그 친구는 다음 미팅이 있다고 가버렸다. 난 그날 저녁, 주고받은 대화 내용을 기반으로 대략의 설계 문서를 작성해서 보냈다. “내가 이해한 게 맞아?” 맞단다. 그리고 다음날부터 코드를 작성하기 시작했다. 내가 작성한 코드를 보내 리뷰를 해 달라고 했다. (그 회사 대표는 개발자 출신이었다.) 그렇게 2주 정도를 하니 대충 동작하는 제품이 만들어졌다. “이제 거의 동작하는 거 같은데, 회사 서버 정보 주면 너도 사용할 수 있도록 세팅해줄게” 난 나를 뽑을 생각도 없는 회사랑 혼자 일을 시작해버렸다. 그리고 혼자서 결과물까지 만들어버렸다. 그리고 찾아가서 얘기했다. “너 나 안 뽑을 거야?” 난 모든 패를 다 깠다. 내가 이렇게까지 했는데도 나를 안 뽑으면 내가 문제인 거다. 내가 실력이 없는 거다. 알고 보니, 그 회사는 주말에만 일할 파트타임 개발자, 아르바이트생을 찾고 있었다. 근데 난 정직원이어야 하고, 비자문제도 해결해야 하고, 가족이 있으니 급여도 많이 줘야 한다고 말했다. 그 친구도 아주 난감해했다. 자기 회사 재무상황을 다 까 보여주면서, 우리 회사는 나를 뽑을 형편이 안된다고 말한다. 자기도 그만큼의 급여는 못 가져간다고.. 대신 비자 문제는 처리해주겠단다. 그때 나에게 제일 중요한 건 비자였다. 돈은 둘째였다. 비자가 없으면 중국을 떠나야 하니까. 나의 급여는 반 토막 이상으로 줄었지만, 정직원 계약서는 쓸 수 있었다.

앞에서 얘기한 회사 청산 절차는 질질 끌어서 그해 6월까지나 이어졌다. 회사 문을 닫기로 하고 4달이나 걸렸다. 나에게 그 4달은 충격을 받고, 거기서 헤어나와, 먹고 살 길을 찾기에 충분한 시간이었다. 난 6월 30일에 공식적으로 해고 통지를 받았고, 거짓말처럼 7월 1일 새로운 회사로 출근하게 되었다. 그렇게 중국 로컬 회사 생활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그 후 더 큰 복병이 기다리고 있었다. 중국 생활의 최대의 위기.

외국에서 살려면 비자를 받아야 한다. 어느 나라나 비자 관련 업무는 어렵고 까다롭고 불친절하다. 이전 회사에서는 인사팀에서 비자 문제를 알아서 다 처리해 주어서 그게 큰 문제가 되지 않았다. 근데 이젠 다 내가 직접 해야 한다. 더더군다나 난 그런 행정 업무에 너무 약하다. 뭘 어떻게 해야 하는 것인지 잘 모른다.

난 결국 사고를 쳐버렸다. 이직하는 과정에서 취업증 관련 서류 작업을 잘못해서 내 비자가 말소되어 버렸다. 취업비자와 연결된 회사 변경 작업을 하면서 실수가 있었다. 그냥 간단히 연장만 하면 되는 거였는데, 그걸 잘못해서 내 취업비자가 없어져 버렸다. 취업비자를 처음부터 다시 발급을 받아야 하는데, 이건 한국에서 처음 중국 나올 때 했던 작업을 처음부터 다시 해야 한다. 노련한 대기업 인사팀에서 해도 첫 비자 발급은 쉽지가 않다. 근데 코로나 기간에, 아무도 도와주는 사람 없이 그걸 혼자 해야 한다. 서류 하나 떼기도 쉽지가 않다. 대학 졸업장, 성적증명서, 범죄증명서, 이력증명서, 주민등록등본, 등등 제출해야 할 문서가 한 다발이다. 각종 문서 원본을 발급받아 번역하고 공증을 받아 출입국관리소에 제출해야 한다. 그리고 그 해에 비자 발급 절차도 많이 바뀌어서, 비자 발급 에이전시 업체들도 정신을 못 차리고 있을 때였다. 더 큰 문제는 내가 가지고 있는 비자는 임시비자로 기한은 딱 2주밖에 남아 있지 않았었다. 당장 중국을 떠나야 한다.

비자 발급 절차는 이렇다. 일단 출입국 관리소에 가서 비자를 연장한다. 그러면 4일 정도 후에 2주짜리 임시 비자를 받을 수 있다. 그렇게 임시비자 번호가 나오면, 그 번호로 노동국에 취업증 신청을 한다. 취업증 심사에는 일주일 정도 걸린다. 일주일 후에 심사 결과를 통보받을 수 있다. 중국어로 빽빽이 적힌 몇 장짜리 안내문과 함께, 제출 자료 불충분으로 취업증이 거절되었다는 통지를 받는다. 거절한 이유도 알려주지 않는다. 그러고 나면 내 비자의 남은 기한은 일주일… 한국으로 EMS를 주고 받으며 서류를 준비하면 일주일을 훌쩍 넘기게 된다. 그러면 난 그전에 출입국관리소에 가서 비자를 다시 연장해야 한다. 그렇게 다시 임시 비자를 발급받고, 노동국에 취업증 신청을 넣으면 일주일 후에 또 거절.. 이걸 6번이나 했다.

어느나라나 출입국관리소에서 일하는 사람들은 고자세다. 필요 이상으로 엄하다. 비자 만료 하루 전에 연기 신청을 하러 간다. 거기서 난 “내일 당장 돌아가!”라는 대답을 듣는다. 아, 오늘은 어떻게 임시 비자를 받아내야 할까? 소란을 피우기도 한다. 통과 도장을 찍어주기 전까지 절대 자리를 안 뜨며 뻐팅기기도 한다. 그것도 한두 번이지…

한 담당자에게 질문 공세를 퍼붓는다. 옆 창구로 가서 똑같은 질문 공세를 퍼붓는다. 두 담당자가 다른 얘길 하는 걸 포착해낸다. 그러곤 그들을 혼란스럽게 만든다. ‘옆에선 이렇게 말했는데, 넌 다르게 말하네? 너 잘 모르는구나? 사실 원칙이 없는 거 아니야?’ 그렇게 소란을 피우고 있으면 윗사람이 나타난다. 그에겐 세상 착한 얼굴로 사정한다. 윗사람에겐 ‘너희가 못하는 걸 나는 할 수 있어!’라는, 자신의 권력을 드러내고 싶어 하는 마음이 있는데, 그 과시욕을 자극한다. 그렇게 겨우 도장을 받아 나온다.

한번은 이런 적도 있었다. “이번엔 절대 안 돼. 내일 돌아가”, “근데, 비행기 표가 없어. 코로나 때문에 비행기 표 없는 거 너도 알잖아”, “그래? 증거를 가져와”. 난 그 담당자 바로 앞에서 skyscanner에서 조회한 비행일정을 보여주었다. 한국으로 가는 비행기는 없었다. 난 그 화면을 프린트해서 증거자료로 제출했다. “정말 없네? 좋아 이번 한 번만 더 연장해줄게” 그렇게 또 한 번 간신히 넘기고 나오면서 다시 skyscanner에서 조회해보니 비행 일정이 나타난다. 그 담당자 앞에서 조회했을 그때만 조회가 안 되었던 것이다. 헐, 기적인가?

이런 조마조마한 생활이 4달이나 이어졌다.

더 큰 문제는 다른 데 있었다. 그 해 우리 아이가 학교에 입학했었는데, 아이가 입학한 학교는 부모가 취업비자가 있으면 학비가 1/10이었다. 저렴한 학비에 교육 시설도 나름 괜찮아서 그 학교에 보내기로 했는데, 문제는 내 취업비자가 사라져버렸다는 것이다. 등록금이 10배로 늘어나 버렸다. 학교에 사정을 얘기했더니, 학교와 은행이 최종 결산을 하는 날짜가 11월 중순인데, 그전까지 비자 문제를 해결하면, 1/10 금액으로 받아준다고 했다. 비자는 계속 거절당하고 10배의 금액을 등록금으로 내야 하는 날짜도 다가오고, 피가 말리는 시기였다.

그렇게 4달을 끌다가 드디어 취업비자를 받았다. 그날은 학교가 은행에 최종 등록금 정산을 하기 바로 전날이었다. 너무 감사하게도 1/10 가격으로 등록금을 내고 아이를 계속해서 학교에 보낼 수 있었다.

고비는 여기서 끝나지 않았다. 내가 간 회사의 급여가 너무 적었다. 해고 당할 때 받았던 경제 보상금도 거의 다 까먹었고, 이젠 빚을 내서 살아야 할 정도였다. 아, 이렇게 중국 생활을 접어야 하나? 이젠 한국으로 돌아가야 하나? 근데 이렇게 돌아가긴 싫었다. 그러던 어느 날 한 중국 친구에게 문자가 왔다.

“잘 지내니? 나 요즘 OO회사에 다니고 있는데, 여기서 나랑 같이 일할래?”

이 문자를 보낸 친구는 2008년에 반년 정도 함께 일했던 중국인이다. 10년이 넘도록 교류가 전혀 없었는데, 갑자기 문자가 와서 자기 회사에 오라는 것이다. ‘웃긴 녀석이네’ 일단 만났다. 그 친구는 바로 그 자리에서 나에게 줄 수 있는 연봉까지 얘기하며 자기 회사에 오라고 했다. 지금 받는 금액보다 훨씬 높았다. 그 정도면 중국생활을 무리없이 할 수 있을 정도. 뭐지? 생각 좀 해보고 얘기해 주겠다고 했다. 집으로 돌아오며 생각했다. ‘이건 고민할 게 아니야 무조건 가야 한다!’

지금까지 한 번도 돈 때문에 이직해 본 적이 없었다. 근데 이번엔 무조건 돈이다. 이래도 되나? 싶었다. 한 선배와 통화하며 고민을 얘기했는데, 그 선배가 이렇게 말했다. “정말 돈이 필요할 때는 돈을 잡는 게 겸손한 거야” 그 말을 듣는데 눈물이 났다. 지금 돌아보면, 그때 내 마음이 겸손이었는지 잘 모르겠다. 돈에 눈이 확 돌아버린 것인지, 정말 겸손이었는지, 아니면 욕심이었는지… 그 선배는 나에게 가장 필요한 말로 나를 위로해 주었고, 나의 삶을 이어갈 수 있게 해 주었다.

그 회사는 꽤 부담스러운 일을 요구했다. ‘내가 그 일을 할 수 있을까?’ 근데, 그런 걸 생각할 처지가 아니었다. 그냥 무조건 해야 했다. 그리고 든 또 한가지 생각은, ‘그 난감한 일을 누가 할 수 있을까?’ 그런 걸 해 본 사람은 중국땅에 한 명도 없을 거다. 그걸 능숙하게 잘해낼 사람은 없다. 누가 하든 난감한 일이다. 누가 하든 마찬가지라면, 내가 하자!

친구가 나에게 자기 회사에 오라고 하긴 했지만, 난 그 회사의 윗사람들을 설득해야 했다. 이 전과 같은 방법, ‘면접 구도를 만들지 말자’. 난 그 회사에서 하게 될 일을 그냥 시작했고, 면접 자리에서는 그냥 일 얘기만 하다가 왔다. 질문 공세를 퍼부으며, 내가 이미 시작한 일에 대해 피드백을 받으며, 그런 시간만 보내다가 왔다. 그리고 합격 통지를 받았다. 2022년 4월. 그 회사에서 일을 시작했다. 세계에서 물가가 높기로 손꼽히는 북경에서 외국인으로 살아갈 수 있을 만큼 충분한 돈도 받았다. 그동안 가슴 졸이며 살았던 시간에 대한 보상일까? 우리 가족은 풍족한 일 년을 보냈다.

그렇게 일 년쯤 지난 어느 날. 아내와 대화하며 지난 일 년을 돌아보게 되었다.

“우리가 지금처럼 아무 걱정 없이 이렇게 편안하게 살았던 적이 있었나?”

서로 이런 얘기를 했고, 이어서 우리 둘 모두에게 동시에 든 생각.

“떠나자. 우리의 중국 생활은 여기까지구나.”

계획에도 없이 시작된 중국생활. ‘하나님은 왜 우리를 중국으로 보내셨을까?’ 그걸 궁금해했었다. 지금은 모르지만 무슨 이유가 있겠지. 한국에 돌아갈 이유는 숱하게 많았었다. 하지만 그 이유로는 움직여지지 않았다. 한해한해 지날 때마다 이런 생각을 했었다. ‘만약 우리가 중국을 떠나게 된다면 무슨 이유로 떠나게 될까?’

지난 일 년간은 회사도, 가족의 삶도, 교회 공동체도, 주변 이웃도. 모든 게 너무 좋았다. 부족한 것이 하나도 없었다. 그래서 중국 생활은 여기까지인가 보다 싶었다.

『욕쟁이 예수』를 읽으며 나에게 각인되었던 단어가 있다. Holy Insecurity. 거룩한 불안정감. 나의 안정감은 불안정함 속에 있을 때 진정으로 하나님만을 바라보는 안정감을 찾게 된다는 말이다.

한국에 들어간다니까 회사에서는 원격으로라도 일을 계속 같이하자고 했다. 솔깃했다. 한국으로 가면 불투명하고 불안한 삶을 살아야 할 텐데 안정적인 수입이 있으면 덜 불안하지 않을까? 하지만 나와 아내는 중국의 모든 걸 끊어내고 들어가자고 했다. 이전의 안정적인 삶에 반쯤 걸쳐있는 이도 저도 아닌 삶. 그런 삶은 나에게 아무런 메세지를 주지 못한다.

우린 다시. 불안한 삶으로, 그래서 거룩함에 약간 더 다가갈 수 있는 삶으로 들어가기로 했다.

한국으로 와서 오랜만에 친구들을 만났다. 창업한 이야기를 했다. 일찍 창업해서 회사를 운영하고 있는 한 친구가 이런 얘기를 한다. “어휴, 시작 하지 않았으면 끝까지 말렸을텐데. 시작해버렸으니 어쩔 수 없네. 살아남아봐봐. 사업 존나 어려워~”. 나중에 나의 중국 이야기를 듣더니 얘기한다. “근데, 너 얘기 들어보니, 니가 중국에서 생존한 거 보다는 쉽겠다.”

그래, 어떻게든 살아남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