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님의교회 청소년부 몽골 단기 선교
2025년 7월 28일 ~ 8월 3일
시작 자는 둥 마는 둥 뒤척이다 알람이 울렸다. 새벽 3:40이다. 잠을 잔 것 같지도 않은데 교회로 가야 한다. 침침한 눈을 비비며 비전홀로 갔다. 이미 도착한 아이들도 있다. 아이들이 하나둘씩 부모님과 함께 나타났다. 자녀를 처음으로 ‘선교’의 이름으로 먼 곳으로 보내는 부모님들. 다 함께 빙 둘러서서 기도를 했다. 우린 부모님들의 배웅을 받으며 버스에 올랐다. 시작이다.
인천공항에 도착해 탑승 수속을 끝내고 아침을 먹은 후 비행기에 올랐다.
주님의교회 청소년부 여름 수련회
2025년 7월 18일 ~ 20일
가평 어피어 연수원
요셉의 꿈 어느 날 요셉은 꿈을 꾼다.
형들의 곡식단이 요셉의 단에 절하고, 해와 달과 별이 요셉에게 절한다.
이런 꿈은 누구나 꿀 수 있는 거잖아. 그래봤자 그냥 기분 좋게 하루를 시작하는 정도잖아. 하늘을 날거나 슈퍼맨이 되거나 영웅이 되어서 악당을 무찌르는 그런 꿈은 다들 꾸는 거잖아. 누구나 자면서 꿀 수 있는 이런 사소한 꿈이 하나님의 계시일 리가…
요셉은 진짜로 그렇게 될 거라고 생각한다.
주님의 교회 청년 주일(성년식) 예배를 드리며
5월. 수줍게 피어있던 여린 이파리들이 이제 본격적으로 존재감을 드러낸다. 짙은 초록으로 넘어가기 직전의 마지막 연둣빛이 예쁘다. 오랜만에 본 스무 살 친구들의 모습이 이랬다. 오늘 예배때 한 성년식 행사로 작년 고3이었던 우리 반 아이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열아홉 땐 입 꾹 다물고 무게만 잡고 있던 아이들이 내가 알던 그 아이가 맞나 싶을 정도로 능글능글해졌다. 먼저 다가와 말을 걸고 낯간지러운 말도 한다. 예뻐지고 멋있어지고 말끔해졌다. 자신을 가꾸는 법도 배워간다.
주님의교회 청소년부 겨울 수련회
2025년 2월 7일 ~ 9일
강화성산예수마을
다양한 모습의 예배자 무대에서 마이크를 잡고 찬양을 이끈다. 그 앞으로 뛰어나와 온몸으로 춤을 추며 찬양한다. 가만히 서서 눈을 감고 하나님을 찬양한다. 한쪽 옆엔 여러 악기로 소리를 만들어내는 세션 팀이 있다. 멀찍이 앉아서 그 모습을 조용히 바라보며 가사를 읊조린다. 저 뒷자리에 서서 두 손을 높이 들고 부르짖는다. 중간중간 지쳐 있는 아이들도 있지만, 마음으로는 하나님을 찾고 있다. 음향, 조명, 영상으로 사람들의 시선과 마음을 한곳으로 모은다.
주님의교회 청소년부 수련회
2024년 7월 26일 ~ 28일
강화도 신덕수양관
내가 좋아하는 젬베로 내가 좋아하는 찬양을 한다. 가죽을 치며 나는 소리가 손바닥을 타고 몸 안으로 들어온다. 미세한 진동이 피부에 느껴지고 심장으로 전해진다. 소리는 손바닥의 타격감에서 시작된다. 손의 통증이 소리를 만들어낸다. 그 통증이 좋다. 손바닥의 얼얼함이 은혜를 머금고 있는 느낌이다.
교회 열등생 난 교회 열등생이었다. 하나님을 어떻게 만나야 할지 몰랐다. 하나님은 계속해서 내 옆에 있었는데 난 다른 곳에서 하나님을 찾았다. 그걸 알기까지 참 오래 걸렸다.
Lord of the Dance
초등학교 때였나 중학교 때였나? 이 찬양을 처음 보았을 때, 약간 충격이 있었다.
좀 이상했다. 그때 정서와 어울리지 않는 느낌이었다. 가사도 뭔가 파격적이고 부르다 보면 빠져드는 듯한 멜로디.
이 찬양을 어떻게 알게 되었을까? [찬미예수] 뒤적이다 혼자 발견한 것 같다. 난 이 찬양이 좋았다. 혼자 5절까지 부르며 등줄기가 찌르르~~ 했던 기억도 있다. 그런 걸 전율이라 그러지. 요즘 애들은 ‘소오~~름’ 이라 그러나?
보수적인 교회에서 듣던 예수의 모습이 아니었다. 춤이라니! 1절 가사는 그렇다 치자.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보시기에 좋았단다.
창조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하나님은 실패했다. 자신의 피조물에게 반역 당했다. 어쩌면 예정된 실패였는지도 모른다. 그들과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면 사랑밖에 못 하도록 해야지,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으니 실패가 보장된 길이다. 선악과도 그렇다. 뭐든지 마음대로 먹으라 해 놓고 딱 하날 먹지 말라니 원 참. 제 뜻대로 해도 좋은 사람은 자유롭게 그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과일을 따 먹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판을 흔쾌히 짜고 그 안으로 기꺼이 침투하신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아버지는 앞서 걷는 사람이었다. 우리 삼 남매는 엄마 손을 잡고 옆으로 늘어져서 걸었고 아버지는 서너 발 앞에 있었다. 걸음걸이도 빨랐다. 작년 10월 아버지는 전립선암 수술을 받았다. 이제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천천히 움직이신다. 세월이 많이 지났구나.
아버지는 경주 관광공사에서 노조 지부장을 하셨다. 앞장서서 운동하다가 이런 생각을 했단다.
‘지금 시대에 노동 운동을 한다는 건 목숨을 바치는 거구나. 어차피 목숨을 바칠 거라면 하나님께 바치자.’
바로 사표를 쓰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2020년 회사가 없어지고, 중국에서 버티기로 했던 동료가 한 명 더 있었다.
그 친구도 살길을 찾아 북경을 떠나 상해로 가야 했을 때, 이런 얘길 했었다.
“이 세상을 강한 멘탈 만으로 살아가기에는 만만치가 않을 거야.”
그러면서 내가 믿는 하나님을 소개했다.
“나도 멘탈이 꽤 강한 편인데, 그 멘탈을 믿고 살기엔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더라.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난 진작에 못 버티고 무너졌을 거야.
내 삶을 진짜로 지키고 싶으면, 멘탈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야 해.”
그 후 여기서 3년을 더 보냈다.
어제 아침 교회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뒤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고등부 아이들을 보는데,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 비슷한 또래 아이들이었을 텐데…
지금 내가 뭘 해야 할까…?
고등부 선생님으로써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있었다.
그건,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고 그 아픔을 함께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
이 아이들도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 접했을 그 충격적인 소식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을 텐데.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그것을 가르쳐야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