길게 달리기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와 보니 우리 집 건물 바로 옆에 수영장이 있어서(100 보도 안됨) 연회원권을 끊었다. 이렇게 수영장을 끊어서 다닌 것은 수영을 처음 배우던 대학교 때 이후 처음이다. 일주일에 2번 가는 것을 목표로, 꾸역꾸역 수영장에 가고 있다.
처음 몇 주는 25m 레인을 2바퀴씩 돌았다. 2바퀴 돌고 쉬고, 2바퀴 돌고 쉬고. 그것도 힘들더라. 그러다 어느 날 6바퀴를 돌았고, 그 다음번엔 20바퀴를 돌았다! 스스로 놀랍게 여기는 것은, 지금보다 체력이 월등히 좋았던 20대 때도 4~5바퀴 이상 돌지 못했다. 분명 그때보다 체력이 훨씬 줄었는데 지금은 수영장에 가면 일단 20바퀴 돌고 시작한다. 차이가 뭘까? 비결이 뭘까?
숨이 찬 상태를 유지하기
2주 전, 老板과 대화하다가 마라톤의 이미지를 떠올렸다. 풀코스, 하프코스는 뛰어본 적은 없고 10km는 여러 번 뛰어봤었다. 그때의 느낌을 떠올려보면, 일단 뛰기 시작하면 숨이 찬다. 그게 3km든, 5km든, 10km든. 숨이 차는 그 상태를 계속 유지하면서 달리는 거다. 그 느낌을 가지고 수영을 해 보기로 했다. 그 전과 똑같이 2바퀴를 돌자 당연히 숨이 확 차오른다. 하지만 숨이 찬 그 상태를 계속 유지했다. 숨이 찬 그 상태에서 5바퀴, 10바퀴, 20바퀴까지 멈추지 않았다.
숨이 찬 상태를 유지하기. 20대 때는 그 방법을 몰랐다. 늘 온 힘을 다 하려고 했고, 힘을 다 소진한 후에는 멈추고 거친 숨을 몰아쉬어야 했다. 늘 에너지의 최대치를 사용하려고 했고, 그래서 오래 지속하긴 어려웠다.
올해 시작할 때의 난 갑자기 주어진 새로운 책임 앞에 번아웃되고 드러누워버렸었다. 그때까지만 해도 길게 달리는 법을 몰랐었다. 올해를 보내면서 새로운 책임은 계속 주어졌고, 점점 무거워지는 임무와 새롭게 요구되는 일들을 그래도 내 삶의 일부로 잘 소화해가며 한해를 보내왔다. 수영 20바퀴를 돌며 터득한 그 방식을, 이미 삶에서는 시작하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올해를 돌아보면 꽤 큰 일을 치러내고 있는 것 같지만, 어쩌면 이건 한 번의 이벤트가 아니라 일상일 수도 있겠다 싶다. 즉 숨이 차 있는 이 상태를 계속 지속해가야 하는 게 앞으로의 삶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 본다.
집중
그리고 한 가지 더.
혼자 차가운 물에 들어가서 20바퀴를 쉬지 않고 도는 것은 대단히 힘이 들면서도 지겨운 일이다. 그 지겨움에 약간이라도 집중력을 흩트리면 곧 호흡이 불안전해지고 입으로 물이 쑤욱 들어온다. 그러면 그 호흡을 놓치게 되고, 한번 놓친 호흡으로 숨은 가빠진다. 그것을 회복하려다 체력이 쑤욱 고갈된다. 그래서 동작 하나하나를 집중해서 움직여야 흐트러지지 않고 그 속도를 이어갈 수 있다.
회사에서 매일 점심시간마다 함께 탁구를 치는 동료가 있다. 처음에는 둘 다 초보였는데, 매일 하다 보니 둘 다 실력이 꽤 늘었다. 5세트씩 치는데, 요즘에는 매 세트가 접전이다. 듀스에 듀스를 이어가며 겨우 한 세트 한 세트를 끝낸다. 이렇게 5세트를 끝내고 나면 한겨울인데도 온몸에 땀이 난다. 이때도 마찬가지. 약간의 방심으로 집중력이 흐트러지면, 상대는 그 약간의 틈을 비집고 들어오면서 점수 하나를 따낸다. 이렇게 매일 탁구를 치니까 이제는 실력은 큰 차이가 없다. 승패를 가르는 것은 딱 하나다. 누가 마지막까지 집중력을 흐트러뜨리지 않고 끝까지 유지해가나?
지속하기
수영을 하다 보면 아주 천천히 뉘엿뉘엿 움직이고 있는 사람을 만난다. 예전에는 그런 사람이 있으면 옆으로 쑤욱 앞질러 지나가 버렸었다. 하지만 그렇게 순간의 힘을 쥐어짜는 행동은 내 호흡을 흐트러뜨리고, 결국 길게 달리지 못하고 멈춰 서게 만든다.
그리고 신기한 것 한 가지. 10바퀴를 넘어서다 보면 숨이 오히려 편해질 때가 있다. 분명 시작할 땐 숨이 찼었는데, 그것을 한참 지속하다 보니 그 상태가 오히려 편안해지는 시점이 온다.
시간이 지날수록 책임은 더해질 것이다.
이 느낌을 유지하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