있는 모습 그대로

내일 송년모임에 있을 선물교환식을 위해 MUJI에 가서 노트와 펜을 골랐다. 아내가 딱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똑같은 세트로 3벌을 샀다. 하나는 원래의 목적대로 선물교환식 용. 그리고 나머지는 아내와 나를 위한 선물.

노트에 뭔가를 쓰고 싶어서 첫 페이지를 열었는데, 선뜻 첫 글자가 써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맴도는 말은 많았지만, 이 예쁜 노트에 이 예쁜 펜으로 아무 글자나 쓰고 싶지 않았다. 뭔가를 쓰기 위해 노트와 펜을 샀는데, 막상 쓰려니 망설여지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이유는 간단했다. 잘 쓰고 싶어서… 잘 쓰고 싶다는 욕구 때문에, 아무것도 못쓰고 있었다.

쓸데없는 고퀄리티

벌써 중국 생활도 4년을 꽉 채웠다. 중국에서 4년을 보내면서 느낀 한국과 비교되는 것 한 가지는, “Made in China의 허접함"이다. 아ㅡ “허접함"이란 단어는 부정적인 뉘앙스를 담고 있네. “Made in Korea의 쓸데없는 고퀄리티"로 바꾸자.

Made in Korea는 예쁘고 비싸다. 그런 예쁜 수첩과 펜을 사면 기분은 좋다. 뭔가 내 정신까지 깨끗하고 맑아지는 기분이다. 하지만 문제는, 그렇게 맑고 깨끗한 그곳에 아무것도 쓰지 않는다는 것이다. 조심조심 예쁜 것들만 담게 된다는 것이다. 하지만 내 머릿속에서 쉬지 않고 진행되는 생각의 과정을 솔직히 들여다보자. 예쁘고 깔끔한 것은 몇 안되고, 대부분이 누가 알면 민망한 것들일 테다. 그런 것들은 예쁜 노트에 적고 싶지 않다. 깔끔하게 정돈된 형태로 드러내고 싶다.

중국에서 파는 노트와 수첩은 싸고 허접한 것들이 많다. 정말 깜짝 놀랄 정도로 가격이 저렴하다. 노트 하나에 200원, 펜 하나에 100원 정도다. 무려 2019년에, 이 가격으로, 노트와 펜을 살 수 있다니. 당연히 퀄리티도 딱 그 수준이다. 그렇게 산 노트에는 아무거나 막 적을 수 있다. 정리할 필요 없이, 대충 끄적이다가 버리면 그만이다.

이재영 교수님도 ⟪탁월함에 이르는 노트의 비밀⟫ 책에서, 일단 “아무” 스프링 노트를 하나 사서 “뭐든지 쓰라"라고 하셨다. 그래. 일단 닥치고 뭐든지 쓰고 보는 거다.

김형준님이 허술함을 가장한 애자일(느슨한 서비스) 글에서 중국 서비스의 특징 중 하나로 “허술함"을 얘기했다. 중국에선 “뭔가 허술해 보이는 데 문제없이 돌아간다” 는 것이다. IT 서비스뿐만 아니라 일상생활에서도 이런 모습은 흔히 만난다. 중심가에 있는 삐까번쩍한 백화점에서 공사판에서나 볼 수 있는 철제 구조물을 쳐 놓고 에스컬레이터 공사를 하면서 그냥 영업을 하기도 하고, 5성급 호텔에서도 천장과 양 벽에 합판으로 대충 막아놓고 엘리베이터 공사를 하기도 한다. 마지막 인테리어 마무리가 안되었어도 손님들 앉을자리만 대충 만들어놓고 영업을 시작하는 식당도 있다. 하지만 이런 상황은 잠시, 이런 자질구레한 손질(?)은 금방 마무리되고 곧 깔끔한 모습을 찾아간다.
길거리에 있는 노점상들, 거기서 팔리는 물건들, 그리고 일하는 사람들. 이들을 보면 애자일(Agile) 그 자체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딱 적당한 수준으로만 하기.
최근 무섭게 변하고 있는 중국의 힘이 바로 여기서 나오는 게 아닐까?

있는 모습 그대로

다시 노트 이야기로 돌아가서
그래서 이 글을 쓰다 말고, 오늘 맴돌았던 생각들을 노트 첫 페이지에 적어 내려갔다.

잘할 생각 말고, 그냥 뭔가를 하자.
남과 비교할 필요 없이, 그냥 내 속도에 맞게 한 발 한 발 나아가자. 가만히 제자리에만 있지 않으면 된다.
나이 한 살씩 더 먹어간다고 쓸데없이 무거워질 필요 없다.
더 신중하고 더 침착해지되, 더 가벼워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