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4년 전 초등(국민)학교 1학년 때 친구들과의 대화가 떠올랐다.
“야ㅡ 내가 너보다 더 빨라”
“아니야 내가 더 빨라”
“난 오토바이 보다 빨라”
“난 차보다도 빨라”
“어휴~ 차보다는 당연히 빠르지”
1988년의 초등학교 1학년들. 정말 허세 쩐다.
근데, 지안이가 밥 먹으면서 똑같은 이야기를 한다.
“아빠, 우리 반 OO는 오토바이보다 빠르대~”
“그래? 차보다는”
“어휴~ 차보다는 당연히 빠르지”
아ㅡ 똑같구나. 여전히 허세에 쩔어있는 2022년의 초딩들.
근데, 어른이 된 지금도 크게 다르지 않은 것 같다.
허세를 부리고 싶은 대상이 달라졌을 뿐이지….
어느 날 지인이 나에게 해 뜨는 사진을 보내왔다.
그것을 본 나의 첫 생각. “어쩌라고” ㅋ
그 일출 사진은 나에게 아무런 감흥을 불러일으키지 않았다. 하지만 알고 있다. 그 사진을 보낸 사람의 마음은 그렇지 않다는 것을. 그는 해가 떠오르는 그 모습을 보고 가슴이 벅차올랐을 테고, 그 마음을 함께 나누길 원했을 것이다. 하지만 그 마음까지 사진에 담아서 전달하기는 쉽지 않다.
사진작가는 그걸 하는 사람인 것 같다. 피사체의 모습을 그대로 전달하는 게 아니라, 그것을 봤던 그 순간의 느낌, 감정, 생각, 즉 그만의 이야기를 사진에 담아서 전달하는 것일 테다.
남의 일이 아닌, 내 일 새로 합류한 3명의 동료 이야기다.
매일 아침 데일리 미팅을 하기로 했고. “어제 한 일, 오늘 할 일, 이슈” 딱 이 3가지만 공유하자고 했다. 이슈를 말하라고 했더니, 개발하면서 만났던 여러 어려움을 얘기한다. 그런건 이슈가 아니라고 했다. 이슈가 뭐냐면,
어제 하루 일을 시작하기 전 계획이 있었을 텐데. 하루를 살아보니 계획대로 안되더라 => 이건 당연한 거다.!
그래서 계획이 틀어진 상태로 오늘을 시작했는데, 계획과 실제의 공백이 너무 커져서 이번 주 목표에 차질이 생길 것 같다.
오랜만에 사무실 이야기다.
반년 전, 팀에서 코드 리뷰를 하자고 했을 때 동료들은 불편한 기색을 내비쳤다. 하지만 그들은 나의 제안을 따르는 것 말고는 별다른 방법이 없었다.
내가 코드 리뷰를 시작하기 전 먼저 했던 일은 gitlab runner를 사용해 배포 파이프라인을 구성해 놓는 일이었다. merge request를 만들고, 코드 리뷰를 거치고, 최종적으로 merge가 되어야 배포가 되도록 했다. 그리고 난 개발의 결과를 스테이징 환경에 배포된 것으로만 확인한다고 했다. 개인 PC에서 돌아가는 건 인정하지 않았다 ㅋ
어제 고등부 친구랑 젬베 연습을 했다. 오랜만에 젬베를 치고 있다는 그 자체가 너무 신이 나고 행복했었다.
소리 일정한 리듬을 반복적으로 두드린다.
손바닥의 통증은 곧 소리가 된다.
그 소리는 손바닥을 타고 몸 안으로 들어온다.
손바닥과 젬베 가죽이 부딪히면서 일어나는 공간의 미세한 떨림이 피부에 와 닿는다.
젬베 소리는 심장의 고동 소리와 닮아있다.
마치 내 심장의 소리를 듣는 것 같다.
소리를 온몸으로 느낀다.
이 세상을 바라보는 ‘관찰자’의 입장에서, 그 안으로 쑥 들어가 내가 있는 공간과 하나가 되어 온몸으로 나의 세상을 즐기고 만끽하는 모습이다.
이게 맞는 걸까? 저게 맞는 걸까?
도대체 어떻게 해야 하는 걸까?
우리는 늘 혼란스럽다.
하지만 혼란은 그냥 혼란으로 끝나지 않는다.
혼란은,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해준다. 익숙하게 해오던 방식대로 하던 게 더 이상 익숙하지 않고 어색해질 때, 혼란스럽다. 이렇게도 해보고 저렇게도 해본다. 이렇게 다양하게 시도하고 실패해 보면서 나도 몰랐던 나의 모습을 발견하게 된다. 그것은 곧 삶의 기회로 연결된다. 다양한 경험을 해 볼 수 있는 기회.
처음엔 작은 씨앗처럼 발견되었을 그 모습이, 여러 차례 시도(경험)를 통해 자라난다.
비슷한 시기를 살아왔더라도 그 삶이 비슷한 것은 아니다. 각자의 경험, 인생, 이야기,, 그로 인해 형성된 개개인의 모습은 같을 수 없다. 하지만 또래의 대화에는 그걸 뛰어넘는 공감대가 있다.
우리는 삶의 단계가 비슷하다. 유아기- 청소년기 - 청년 시절 - 신혼 - 아빠 - 학부모 - 중년 - …
이 시기를 지나고 성장해 오면서 어떻게든 나의 삶, 나의 스토리가 생긴다. 그 스토리 안에는 나만의 희로애락이 담겨있고, 후회/아픔도 있다. 하지만 후회/아픔에만 머물러 있는 것이 아니라 어떻게든 그것을 끌어안고 살아가고 있다.
고1 때 이야기다.
뭔가 잘못을 해서 벌을 받아야 하는 친구가 있었는데, 선생님은 그 친구에게 어떤 벌을 줘야 할지 반 아이들에게 결정하라고 하셨다.
우리는 회의를 했고, 그 벌로 교실 청소를 하게 했다.
선생님께 말씀드렸더니 어이없는 말씀을 하셨다.
“청소는 벌이 아니에요. 청소는 상이에요. 왜 청소를 벌로 줍니까?”
이게 뭔 소린가 싶었다.
그러고 얼마 후에 칭찬받을 일을 한 친구가 있었는데
선생님은 진짜로 그 친구에게 상으로 교실 청소를 하게 하셨다.
이게 뭔 일인가 싶었다.
처음 투표권이 주어졌을 때, 국민의 대표를 뽑는다는 것보다, 그냥 성인이 되어 할 수 있는 일이 하나 생겼다는 것에 신기해하기만 했던 것 같다.
소중한 한 표라고 말을 하긴 하지만, 나의 한 표가 이 세상의 앞날에 무슨 영향을 끼칠 수 있을 거라 생각하지 않았던 것 같다.
선거 때마다 투표하긴 했지만 매번 헷갈렸다.
공약집을 읽어보면, 죄다 어려웠고 그 말이 그 말 같았다. 별 차이가 느껴지지 않았었다.
나에게 주어진 소중한 한 표를 아주 하찮게, 가볍게 사용해 버렸었다.
마흔 번째 생일이 막 지났다.
생일을 빌미로 오랜만에 연락해 온 친구들과 대화를 나눌 수 있어서 좋았다.
한 친구랑 이런 말을 했다.
“내가 마흔이 되는 날이 오리라곤 정말 상상도 못했었다!” ㅋ
나이를 먹는다는 건, 어느 한 시기를 끝마치고 다음 시기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지난 삶 위에 새로운 삶이 얹혀져서 스펙트럼이 쭉 넓어지는 느낌이다.
난 이미 마흔이 되었지만, 17살, 20살, 26살, 30살의 장재휴는 여전히 내 안에 남아 있어서, 그때의 내가 불쑥불쑥 나타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