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의 분산

남의 일이 아닌, 내 일

새로 합류한 3명의 동료 이야기다.
매일 아침 데일리 미팅을 하기로 했고. “어제 한 일, 오늘 할 일, 이슈” 딱 이 3가지만 공유하자고 했다. 이슈를 말하라고 했더니, 개발하면서 만났던 여러 어려움을 얘기한다. 그런건 이슈가 아니라고 했다. 이슈가 뭐냐면,

어제 하루 일을 시작하기 전 계획이 있었을 텐데. 하루를 살아보니 계획대로 안되더라 => 이건 당연한 거다.!
그래서 계획이 틀어진 상태로 오늘을 시작했는데, 계획과 실제의 공백이 너무 커져서 이번 주 목표에 차질이 생길 것 같다.
그래서 이건 다른 누군가의 도움이 필요하다.

이런것이 이슈라고 했다. 이런 이슈를 매일 스스로 판단해서 데일리 미팅 때 공유하라고 했다.

이 얘기를 하는데, 동료의 눈 옆 근육이 살짝 떨리는 것을 포착했다.
'하루 일을 시작하기 전 당연히 계획이 있었을 텐데...'
이 말을 하던 순간이었다. 그렇다. 이들은 일하면서 한 번도 스스로 계획을 세워본 적이 없었다. 팀장은 매주 월요일 개발자들에게 할 일을 쭉 할당해주고 1주일 후에 그것을 확인한다. 다 못한 일이 있으면 그냥 그 일은 다음 주로 넘긴다. 회의시간에, 팀장이 생각하는 진도를 검사하는 것 말고는 다른 의미 있는 일은 전혀 일어나지 않는다.

지금까지 그렇게만 일해오던 그들에게,
“꼭 todo list로 뽑아놓지 않았더라도, 너의 머릿속에는 오늘 할 일에 대한 너의 계획이 반드시 있을 거야.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데, 오늘 뭘 하지? 에 대한 생각이 없을 수 없어. 너의 머릿속에 숨어있는 그 생각을 끄집어내 봐. 그게 너의 계획이야. 팀장의 계획 말고 너의 계획”
라고 말했다.

내가 할 일에 대해 스스로 생각하고 직접 나의 계획을 세우도록 한다. 내가 할 일은 내가 결정하고, 그 가운데 발생하는 어려움도 내가 직접 드러내고, 그렇게 내 삶을 스스로 살아가도록 하는 것이다.

그들이, 사무실 바깥에서도 환경, 압박, 주위 분위기에 흔들리지 않고, 내가 할 일은 스스로 결정하는 사람이 되면 좋겠다.

민낯 드러내기

그(팀장)와의 설계 토론이 점점 깊숙이 들어갔다. 때마침 벽에 붙어있는 화이트보드가 보였고, 저기에다가 우리의 생각을 그려보자고 제안했다. 그러자 그는 약간 당혹스러운 표정을 지으며 회의실로 가자고 했다(사무실은 3층, 회의실은 1층).
사무실에서 도망가려고 한다.
회의실로 가면서, 논의 중간에 장소를 바꾸는 것은 별로 좋지 않다고 했다. 그는 각 잡고 제대로 회의하고 싶어서 회의실로 가려고 한 거였겠지만, 회의실로 걸어가면서 머릿속의 생각들이 날아가 버린다. 생각의 흐름이 끊어진다. 논의사항이 생기면 바로 그 자리에서 논의하라고 화이트보드를 달아놓았을 텐데.

그러자 이런저런 변명이 이어진다.

  • “내 목소리가 커서 사람들에게 방해된다”
    엥..? 늘 우렁찬 목소리를 자랑하던 그의 목소리가 갑자기 작아진다.
  • “이건 그냥 전체 일정을 써놓는 용도다”

하지만, 다행히(!) 빈 회의실은 없었고, 아까 그 화이트보드 앞으로 돌아와 거기서 그림을 그리며 논의를 이어갔다. 논의를 끝내고 이제 각자 자리로 돌아가 코드로 구현해 보면서, 난 아까 그렸던 그 화이트보드를 보면서 회의 때 나왔던 이야기를 떠올리려고 했다. 근데 웬걸, 화이트보드는 깨끗하게 지워져 있다. 그는, 너무 지저분하게 그려서 지웠다고 했다. 위키에 다시 깔끔하게 정리해 놓겠단다.
아ㅡ 그놈의 정리. 또 도망가려고 한다.

그는, 화이트보드에 그려진 자신의 그림(민낯)이 부끄러웠다. 여러 동료가 보는 앞에서 멋있는 그림을 쓱쓱 그려내고 싶었을 텐데, 화이트보드에 그려진 그림은 그렇지 않다. 그래서 그건 얼른 지워버리고, 자리에 돌아와 다시 멋져 보이는 그림을 그리려고 했다. 난, 그가 지워버린 그 그림이 훨~~~씬 더 좋은 그림이라고 했다. 논의하면서 화이트보드에 자연스럽게 그려지는 그 그림에는 문제의 맥락이 남아있다. 결론으로 가는 사소한 과정들이 남아있다. 왔다갔다하면서 그 그림을 볼 때마다 문제의 맥락이 살아나게 하고 아직 진행 중인 논의를 머릿속에서 이어가게 한다. 그런 민낯이 사람들을 움직이게 만들고 일이 실제로 진행되게 하는 것이다. 보기 좋은 그림을 예쁘게 잘 그려내고 싶어하는 겉멋이, 좋은 설계를 할 수 있는 기회를 놓치게 하였다.
그렇게, 위키에는 예쁜 쓰레기들만 쌓여간다.

영향력은 경력, 직위, 목소리에서 오는 게 아니다. 물론 그걸 이용해서 당위성을 강조할 수는 있다. 하지만 사람은 당위성만으로 움직이지 않는다. 사람을 움직이게 하는 진짜 영향력은 리더의 민낯에서 오는 것 같다. 그의 우렁찬 목소리가 아니라 나도 모르게 내면에서 잔잔하게 흘러나오는 모습. 난 그걸 “민낯"이라 부른다.

긴 경력과 지위가 주는 강한 기운을 빼내고 민낯을 드러내기.
그렇게 그의 리더십에 거품을 빼내고, 거품을 더 풍성하게 만드는 것에 힘을 쓰는 것이 아니라, 그 힘을 내면을 탄탄하게 만드는데 쓰도록 도와준다

힘의 분산

사무실에 들어와 보면, 힘이 과도하게 몰려있는 지점들이 보인다. 마치 세계 지도에 고도가 높은 곳을 찐한 갈색으로 표시해 놓은 것처럼. 사무실에도 그런 지점이 있다. 그건 사무실을 경직되게 만든다. 힘이 몰려있는 지점에도, 힘을 빼앗겨버린 지점에도. 모두에게.

과하게 몰린 힘은 그 사람을 경직되게 만든다. 진짜 영향력을 발휘하게 하는 민낯은 점점 저 깊숙이 숨어버리게 하고, 쓸데없는 껍데기를 만드는데 에너지를 쓰게 만든다. 해를 거듭할수록 거품은 점점 무성해지고 나의 내면은 눈에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아져 버린다. 결국 초라한 이름표만 남게 된다.

힘을 빼앗겨버린 사람은 나도 모르게 점점 구석으로 숨어들어 간다. 힘의 균형이 깨어져 버린 사무실 속에서, 과도한 힘이 내뿜는 위압감에 나는 없어진다.

사무실의 힘을 분산시키고 싶다. 소수 몇몇 사람에게 과도하게 몰린 힘이 소외된 사람에게 조금씩 나뉘기를 바란다. 우리의 사무실이, 거품과 껍데기가 가득 찬 곳이 아니라, 진짜 민낯이 드러나 서로 영향력이 오고 가는 곳이 되게 하고 싶다.

이 세상도 그런 곳이 되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