너무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넘쳐난다.
두서없는 그대로 써내려가 본다. ㅋㅋ
다행이다 얼마 전 결혼 10주년이었다. 매해가 다이나믹 했지만, 특히 지난 일 년은 정말 다이나믹 했다.
출근하면서 이적의 “다행이다"를 듣는데, 눈물이 핑 돌더라. 내가 이적처럼 불러주지는 못하지만, 아내한테 노래를 보내주며,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얘기했다.
정말 다행이다.
성장 엊그제 퇴근하는데, 같은 팀 한 친구랑 우연히 지하철역까지 걸어가게 되었다. 처음 같이 일해보는, 중국말 엄청 어눌한 외국인이랑 20여 분 가량을 걸어가야 했는데, 딱히 할 말이 없어서였던지(ㅋ) 그 친구가 이렇게 물어보더라.
몇몇 소수의 모습이겠거니 생각했다.
근데 소수가 아닌 것 같다.
나 역시 교회 공동체 속에서 자라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맴돌고 있던 생각이다.
감정을 빼낸 상태의 글을 이제야 공유해 본다.
교회는 어떻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가? 교회의 바운더리 교회에서 금기시되는 말이 있다. 그 말을 꺼내거나 모두가 동의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혼난다.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로 혼나면 억울한 마음이 들고 기분이 나쁘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큰 영향을 주진 않는다.
코로나 19로 온 세상이 난리다. 나 개인의 삶도 난리였다.
꽤 큰일을 치르고, 7월 1일이 되었다.
때마침 새벽에 눈이 떠졌고, 뭐라도 남겨야 할 것 같아서 오랜만에 끄적여본다. ㅎ
2주 전 공식적으로 해고 통지를 받고, 어제 北京衣念科技 사무실로 마지막 출근을 했다. 정확히 4년 반 동안이다.
그리고 오늘 새로운 회사에 출근한다.
북경에서 보낸 지난 4년이 시도와 실패의 반복이었지만, 특히 지난 3개월은 정말 새로운 시도와 실패가 반복되는 매일을 보냈다. 청산하기로 한 회사에서 남아 있는 동료들과 뭐라도 해보려고 했었고, 동료들의 이후의 삶을 위해 매각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도 해 봤었고, 200개가 넘는 이력서를 돌리며 취업의 문을 두드렸었고, 새로운 사업 준비도 해 봤었다(시작도 하기 전에 망했다 ㅋ).
2020-04-29 팝잇(popit)에 기고한 글 ⤴️
이 글은 적당히 갖춰나간 운영 환경의 후속 글이다. 이전 글에서는 서비스의 외형적인 모습을 소개했다면, 이번 글에서는 그것을 가능하게 했던 내부의 문화를 소개한다.
MSAMicro Service Architecture
이 삽질을 3년이나 하고 나서야 뼛속까지 알게 되었다. 이건 기술의 문제가 아니었다. 문화였고 일하는 방식이었다. 익스트림 프로그래밍Extreme Programming, 이하 XP이 소개된 지는 이미 20년이 넘었지만, 계속해서 XP를 얘기하는 이유는 MSAMicro Service Architecture는 일하는 방식과 떼어서 얘기할 수 없기 때문이다. 아주 많은 작은 서비스들에게 역할과 책임을 부여하고, 그 서비스들이 상호 작용하며 만들어낸 서로 공존하는 상태.
2020-04-15 팝잇(popit)에 기고한 글 ⤴️
2016년, 중국 패션 리테일 영역의 클라우드 서비스 회사가 되겠다는 야심 찬 희망을 품고 아기 발걸음1을 시작했고, 2020년 현재 아래와 같은 구성을 갖추었다. 처음부터 이런 구성을 그려놓고 차근차근 갖춰 나간 것은 아니었다. 2016년 봄, 알리(Ali) 클라우드에 3대의 리눅스 서버를 구매해서 1대에 대충 스테이징 환경과 각종 관리 툴을 세팅하고 2대 서버에 운영을 위한 최소한의 구성만 갖춘 채 첫 번째 기능을 출시했다. 매번 필요할 때마다 점진적으로 아키텍처를 개선해 나갔고, 4년이 지난 지금 꽤 그럴싸한(?
아주 가까운 지인이 이 영상을 보내왔다.
제목: 5·18 광주 민주화 운동 링크: https://youtu.be/qrDeILrDUos
(유투브 공유용 프레임을 넣고 싶지 않아서 그냥 URL만 넣었음) 그리고 나의 생각을 물었다.
아래는 그 분께 했던 이야기.
이 논리는, 일본강점기 일본이 우리나라 독립군들에 관해 얘기했던 논리와 정확히 일치한다. 앞뒤 배경은 다 짜르고, 그때 정황과 몇 가지 사실에 근거 없는 거짓 정보를 추가해서 얘기하는 거지. “사람들이 무기를 소지한 채 폭동을 일으켰고, 그 폭동에 선량한 사람들과 일본 지주들이 피해를 당하였다.
내일 송년모임에 있을 선물교환식을 위해 MUJI에 가서 노트와 펜을 골랐다. 아내가 딱 좋아할 만한 스타일이었다. 그래서 똑같은 세트로 3벌을 샀다. 하나는 원래의 목적대로 선물교환식 용. 그리고 나머지는 아내와 나를 위한 선물.
노트에 뭔가를 쓰고 싶어서 첫 페이지를 열었는데, 선뜻 첫 글자가 써지지 않았다. 머릿속에 맴도는 말은 많았지만, 이 예쁜 노트에 이 예쁜 펜으로 아무 글자나 쓰고 싶지 않았다. 뭔가를 쓰기 위해 노트와 펜을 샀는데, 막상 쓰려니 망설여지는 이 아이러니한 상황.
지금 사는 곳으로 이사와 보니 우리 집 건물 바로 옆에 수영장이 있어서(100 보도 안됨) 연회원권을 끊었다. 이렇게 수영장을 끊어서 다닌 것은 수영을 처음 배우던 대학교 때 이후 처음이다. 일주일에 2번 가는 것을 목표로, 꾸역꾸역 수영장에 가고 있다.
처음 몇 주는 25m 레인을 2바퀴씩 돌았다. 2바퀴 돌고 쉬고, 2바퀴 돌고 쉬고. 그것도 힘들더라. 그러다 어느 날 6바퀴를 돌았고, 그 다음번엔 20바퀴를 돌았다! 스스로 놀랍게 여기는 것은, 지금보다 체력이 월등히 좋았던 20대 때도 4~5바퀴 이상 돌지 못했다.
어릴 때 난 꿈이 없었다. 어른들이 ‘꿈, 장래 희망’ 이런 것들을 물어볼 때 나만 뭔가 뒤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축구선수’, ‘농부’, ‘선생님’, ‘의사’ 이런 대답을 바로 해버리고 싶었는데, 난 그런 게 없었다. “아직 없어요"라고 부끄럽게 말하기도 하고, 그때그때 ‘과학자’, ‘의사’ 이런 것을 만들어내서 말하기도 했다. 어른들이 그런 곤란한 질문을 할 때면 대충 얼버무리거나, 아니면 잠시 ‘루저loser 패배자‘가 되어야 했다.
고2 때 문과/이과를 나눠야 했다. 난 국어/영어보다는 수학/과학이 재밌었고 점수도 그쪽이 높았다.
마음의 준비 2019.02.03 인천공항에서 환승 대기 중
어제 저녁부터 머리가 아팠다. 체했나 보다.
한솔이가 나를 보더니 얼굴이 완전 노랗단다. 너무 신경을 많이 쓴 게 아니냔다.
아니라고 했지만, 한솔이는 몸이 다 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신경을 많이 썼었나 보다. 2019년이 시작되면서 아웃리치와 고등부 총무 일이 많이 부담이 됐었나보다. 신경써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아플 뿐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바뀌는 것은 없고, 오히려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하려다 번아웃되고, 체하고, 얼굴은 노랗게 변해버린 채 아픈 머리를 잡고 누워버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