대곡역에서 출발하는 서해선. 텅빈 지하철이 들어온다. 보이지 않는 자리 쟁탈전, 위치선정이 중요하다. 문에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간발의 차로 다른 사람이 앉았다. 얼른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빈자리가 눈에 들어왔는데, 이미 늦었다! 다른 사람이 막 앉아버렸다. 아침부터 참 정신없다. 아ㅡ 맞다! 오늘 내 생일이지.
지난 삼다 독회때 보미님 글이 인상적이었다. 죽음을 편안하게 말하더라. 나의 장례식에 올 조문객에게 들려줄 글을 쓰고 그때를 위한 음악을 선곡하고. 나의 존재를 죽음이 어찌할 수 없다는 강함이 느껴졌다.
인터넷의 등장으로 세상이 빨라졌다. 아이폰이 나오면서 모바일 세상이 시작됐다. 좀 지나자 너도나도 클라우드 얘기를 꺼낸다. 아무데나 ‘빅데이터’라는 단어를 갖다 붙이고,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로 사람을 조급하게 만든다. 1년 전 ChatGPT가 나왔다(정확히는 13개월 전). 열기가 사그러드나 싶더니 생성형AI 열풍을 몰고 왔다. IT와 관련이 없는 사장님도 뭐라도 해야 할 것 같은 마음이다. 왜 이리 호들갑이야?
변화는 늘 있었다. 돌을 갈아서 농사를 짓던 시절에도 다른 도구를 만들어내는 사람이 있었다. 그 여파로 세상은 변해왔다. 자연스러운 일이다.
출생 일제시대 말, 경북 의성에 살던 신재식은 결혼하고 만주로 갔다. 그곳에서 첫째 아들을 낳은 후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냈다. 해방 후 아내의 시신을 화장하고 유골을 통에 담아 아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박재익은 고향 마을에서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뱃속에는 아기가 자라고 있는데 남편은 풍토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아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신재식. 남편을 먼저 보내고 딸과 함께 남겨진 박재익. 두 사람은 새 가정을 이루었다. 1954년 가을에 다섯 번째 아이 순자가 태어났다.
또다시 맞이하는 12월 31일이다.
한해의 마지막 날이라고 뭐 특별한 게 있을리 없지만, 이럴 때 괜히 연말 분위기에서라도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작년 12월에 한국에 들어와서 첫 일 년을 보냈다. 올 한해는 하이데어를 가동시키는데 많은 에너지를 썼다. 일이 이렇게 커질지 모르고 가볍게 시작했던 하이데어가 점점 무게감을 드러내었고 거기에 제대로 뛰어들게 만들었다. 올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멈추지만 말자!’
예상보다 더 척박했지만, 이 생각으로 꾸역꾸역 다음 스텝을 이어왔다. 호들갑스럽게 다른 스타트업들 흉내도 내보고, 무턱대고 이일저일 벌여보기도 했다.
주일 새벽이다. 오늘도 1부 예배를 드리고 어린이 부서로 간다. 약간의 압박이 있다. 압박이 있으면서도 살짝 기다려지기도 한다. 이 꼬맹이들이 예배당에 들어오는 걸 보면 반갑다. 환하게 웃으며 들어오는 아이들을 보면 나도 환하게 웃게 된다. 이런 내 모습이 신기하다. 아이들한테 이런 감정이 생기다니..
귀찮은 존재, 그래서 별로 좋아하지도 않았던 어린아이들이었는데. 어떻게 이럴 수 있지? 자주 봐서 그런가? 꼭 그래서만은 아닌 듯. 자주 보는 꼬맹이들한테 늘 마음이 열렸던 건 아니다. 나의 의지가 있었나? 조금은.
오늘, 한국에 들어온지 딱 1년이 되는 날이다. 북경에서의 시간을 다시 회상해본다.
돌아보니 중국에 있으며 아래 3가지를 배운 것 같다.
생존법 사람에 대해 나 자신에 대해 괜히 연말 분위기에, 지난 시간을 돌아볼 겸 각각에 대해 한편씩 글을 써 볼까 한다.
‘재미있으면 쭉 살고, 재미없으면 돌아가지 머’
처음에는 가벼운 생각이었다. 이렇게 시작한 중국 생활이 7년이나 이어질 줄이야…
2015년 12월에 중국에 왔다. 아내가 주재원으로 발령을 받았다. 새로운 곳에서 살아보는 것도 재밌겠다 싶었다. 주재원 임기가 3년이니 재미없으면 임기만 딱 끝내고 돌아오면 될 테고, 재미있으면 그냥 내가 돈을 벌면서 거기서 쭉 살면 되겠지.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보시기에 좋았단다.
창조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하나님은 실패했다. 자신의 피조물에게 반역 당했다. 어쩌면 예정된 실패였는지도 모른다. 그들과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면 사랑밖에 못 하도록 해야지,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으니 실패가 보장된 길이다. 선악과도 그렇다. 뭐든지 마음대로 먹으라 해 놓고 딱 하날 먹지 말라니 원 참. 제 뜻대로 해도 좋은 사람은 자유롭게 그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과일을 따 먹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판을 흔쾌히 짜고 그 안으로 기꺼이 침투하신다.
감사해요 깨닫지 못했었는데 내가 얼마나 소중한 존재라는걸
태초부터 지금까지 하나님의 사랑은 항상 날 향하고 있었다는걸
고마워요 그 사랑을 가르쳐준 당신께 주께서 허락하신 당신께
그리스도의 사랑으로 더욱 섬기며 이젠 나도 세상에 전하리라
당신은 사랑받기 위해 그리고 그 사랑전하기 위해
주께서 택하시고 이 땅에 심으셨네 또 하나의 열매를 바라시며
또, 이 찬양을 부르는데 눈가가 촉촉해졌다.
어린이 부서 예배시간, 꼬맹이들 틈 속에서 이 노래를 따라 부르는데 마음 한켠이 따뜻해져 왔다.
어릴 때 1,2년에 한 번씩 이사를 했다.
지난 수요일에 에버랜드에 갔었다. 사파리 버스를 타고 호랑이, 사자, 곰들을 봤다. 그 가엾은 동물들은 버스 창 바로 앞에까지 와 개인기를 부리며 꼬맹이들의 입에서 환호성을 불러내 주었다.
사자 암수 한 쌍씩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암수가 같이 있는 게 사이가 좋아 보인다. 6~7쌍 정도 있어 보였는데, 모두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그 평화로움이 슬펐다.
원래 사자는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 보통 수사자 하나에 암사자 여러 마리와 새끼들이 한 무리를 이룬다. 사냥은 암사자의 몫이고 수사자는 그냥 어슬렁거릴 뿐이다.
초등학교 3학년 때다. 담임 선생님은 할아버지였고 대머리였다. 깡마르고 키가 컸었는데, 그래서인지 항상 위에서 내려다보는 느낌이었다. 선생님은 그날 왜 그렇게 화가 나 있었을까? 하필 그날 난 준비물인 원고지를 가져오지 않았다. 선생님은 원고지 없이 책상에 앉아 있는 나를 보시더니 때리시다가 발길질을 하셨다. 나는 교실 바닥에 내동댕이쳐졌고, 선생님은 나를 짓밟으며 소리를 지르셨다. “원고지 가져오라고, 원고지!”
대구에 살다가 대전으로 전학을 간 나는, 시간이 꽤 지났는데도 반에 친한 친구가 없었다. 반 아이들은 나를 “사투리”, “촌놈"이라고 놀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