자유인 or 노예

⟪뿌리⟫라는 책을 읽고 하나의 프레임이 생겼다.

자유인 or 노예

특정 프레임에 갇힌 채 세상을 보는 것은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좋지 않은 점이 있긴 하지만, 복잡한 세상을 바라볼 때, 특정 관점에 대한 (그 관점 아닌 것들은 제외하고) 선명한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프레임은 꽤 유용하기도 하다.
자유인 or 노예 프레임은 지금도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어서, 종종 나 자신에게 묻곤 한다.
“나는 오늘 노예로 살았나? 자유인으로 살았나?”

지금 시대에, 21세기에. 노예란 웬 말인가?
자유인으로 산다는 것은 무엇이기에 난 자신에게 이런 질문을 던지는 것인가?

내가 생각하는 “자유"에 대한 이야기를, 소설 ⟪뿌리⟫로 풀어가 보려고 한다.

⟪뿌리⟫

⟪뿌리⟫의 주인공 “쿤타킨테"는 1750년에 서아프리카 감비아에서 태어나 행복한 어린 시절을 보내며, 아주 건강하고 늠름한 소년으로 성장해가고 있었다. 그러던 그가 17세 쯤 되던 어느 날, 흑인 사냥꾼들에게 잡혀 미국으로 끌려가게 된다. 끌려가는 과정은 죽음을 통과하는 듯한 고통스러운 시간이었지만, 미국에 도착한 이후에는 더한 고통이 이어졌다. 어떤 상황 속에서도 아프리카로 돌아가려는 희망을 잃지 않았던 쿤타킨테는, 한 백인 주인에게 팔려가 손과 발을 묶고 있던 쇠사슬이 풀리는 그날 탈출을 시도한다. 탈출하고 잡히고, 또 탈출하고 또 잡히고…. 이것을 4번이나 반복했고, 급기야 발이 잘리고 만다.

하지만 아프리카에 대한 열망을 잃지 않았던 쿤타킨테는 딸 “키지"에게 자신의 고향 아프리카의 이야기를 들려준다. 어릴 때부터 아빠로부터 아프리카 이야기를 듣고 자란 키지는 자신의 아들 “조지"에게 그 이야기를 그대로 들려주었고, 조지 또한 엄마가 들려주는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으며 나중에 자식을 낳으면 할아버지 이야기를 들려주겠다고 다짐한다. 그렇게 쿤타킨테의 이야기는 대를 이어 내려왔고, 그의 7대손 “알렉스 헤일리"는 할머니로부터 듣던 조상 할아버지의 이야기를 파헤치기 시작한다.

그래서 이 세상에 나온 이야기가 ⟪뿌리⟫다.
자그마치 10여 년에 걸쳐서 쓰여진 책이다. 소설로 분류되어 있긴 하지만, 학자들은 이 책을 역사책으로 분류하기도 한다. 그만큼 한 가문의 일대기와 시대의 역사를 담고 있어서겠지.

소설 ⟪뿌리⟫에는 쿤타킨테와 그 후손들의 파란만장한 이야기가 쓰여져 있다. 흑인 노예의 역사에 관심이 있는 사람들에게 꼭 추천해주고 싶은 책이다.

노예의 삶

⟪뿌리⟫에는 흑인 노예들의 삶이 꽤 디테일하게 묘사되어 있는데. 주인이 주입해 주는 생각에 점점 세뇌되어 가는 노예들의 모습을 보여준다.

– p. 509 아빠(쿤타킨테)가 했던 말을 회상하는 키지

아버지의 고향에서는 아들의 이름을 지어 주는 일이 세상에서 가장 중요한 일이라고 아빠가 그토록 힘을 주어 강조했던 말을 키지는 잊지 않았다.
…중략…
흰둥이들이 검둥 사람들에게 자행하는 고통은 끝이 없어 보였다. 하지만 그들이 저지른 잘못 가운데 가장 고약한 짓은 검둥이들로 하여금 자신이 누구인지를 알지 못하게 하고, 그들이 정말 사람다운 사람 노릇을 못하도록 무지한 존재로 만들려는 속셈이라고 쿤타는 말했었다.

백인들이 주입해 주는 생각에 세뇌된 그들은 점점 진짜 노예가 되어갔고, 그들의 삶의 목표는 단 하나뿐이었다.
=> 1) 좋은 주인 밑에서, 2) 편하게 일하고, 3) 많이 먹는 것

이들 노예는 친구들을 만날 때마다, 자기 주인이 얼마나 대단한 사람인지, 자신이 얼마나 좋은 보직을 가지고 있는지, 오늘 어떤 고기를 먹었는지,,, 자기 주인을 찬양하고 자신의 보직을 자랑하는 이야기가 대화의 주된 내용이다. 쿤타킨테의 4대손인 “톰"은 이런 사람들을 볼 때마다 구역질이 올라오는 듯한 느낌이었다.

그 후, 조정래의 ⟪천년의 질문⟫과 ⟪아리랑⟫을 읽었는데, 나는 이 세 권의 책에서 비슷한 내용을 보게 되었다.

  • ⟪뿌리⟫가 이야기해 주는, 200여 년 전 미국의 노예/자유인 이야기
  • ⟪아리랑⟫이 이야기해 주는, 100여 년 전 우리나라의 노예/자유인 이야기
  • 그리고, ⟪천년의 질문⟫이 이야기해 주는, 현대판 노예/자유인 이야기

눈을 들어 내가 살고 있는 삶의 현장을 보면, 우리는 여전히 자유인 or 노예로 살고 있는 것 같았다.

감옥의 삶

“유발하라리"가 쓴 ⟪사피엔스⟫에서는 동물과 구별되는, 인간만이 가진 능력을 “허구를 말하는 능력"이라고 한다.
이것이 “상상의 질서"를 만들어 냈고, 이 상상의 질서가 많은 사람이 모여 유연하게 협력을 할 수 있도록 했고, 그러면서 “문화"가 만들어졌다고 한다. “농업혁명"을 거치며 문화는 더욱 “견고한 아성"이 되어갔고, 아이러니하게도 그것은 “감옥"이 되어 우리를 옥죄게 되었다. 그 감옥(문화)을 유지하기 위해서는, 사람들이 그 질서가 상상의 산물이라는 것을 결코 인정해서는 안 된다. 그래서 우리는 태어나자마자 세상 만물에 스며들어 있는 상상의 질서의 원리에 세뇌되기 위한 철저한 교육(요정이야기, 드라마, 회화, 노래, 예절, 정치 선전, 건축, 요리법, 패션, 등등)을 끊임없이 받게 된다.

사람들이 가장 개인적 욕망이라고 여기는 것들조차 상상의 질서에 의해 프로그램된 것이다. 예컨데 해외에서 휴가를 보내고 싶다는 흔한 욕망을 보자. 이런 욕망은 전혀 자연스럽지도, 당연하지도 않다. … 고대 이집트의 엘리트들은 피라미드를 짓고 자신의 시신을 미라로 만드는 데 재산을 썼지만, 누구도 바빌론에 쇼핑하러 간다거나 페니키아에서 스키 휴가를 보낼 생각은 하지 않았다. 오늘날 사람들이 휴가에 많은 돈을 쓰는 이유는 그들이 낭만주의적 소비지상주의를 진정으로 신봉하기 때문이다.
– ⟪사피엔스⟫ p. 173

고대 이집트의 엘리트처럼, 대부분의 문화에 속하는 대부분의 사람들은 나름대로의 피라미드 건설에 삶을 바쳤다.
– ⟪사피엔스⟫ p. 174

그리고, 이어서 기가 막힌 문장이 나오는데,,,

상상의 질서를 빠져나갈 방법은 없다.
우리가 감옥 벽을 부수고 자유를 향해 달려간다 해도, 실상은 더 큰 감옥의 더 넓은 운동장을 향해 달려 나가는 것일 뿐이다.
– ⟪사피엔스⟫ p. 177

우리의 삶이 정녕 이러하단 말인가?

무엇이 우리를 자유인으로 만들어주나?

표준국어대사전에서 “자유"를 찾아보면 이렇게 정의되어 있다.

「명사」

  1. 외부적인 구속이나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상태.
  2. 법률의 범위 안에서 남에게 구속되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하는 행위.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데,
이게 정말 어려운게,, 내 마음이 뭔지 나도 잘 모른다는 거다.
그리고, 내 마음이 자꾸 바뀐다는 거다.
내 마음대로 하고 싶은 그것이, 다른 무언가에 영향을 아주 많이 받는다는 거다.
내가 하고 싶었던 그것. 그건 정말 내가 진정으로 원했던 것일까???
즉, 내 마음대로 하는 것 같지만, 사실 나는 내 마음대로 하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영향을 주었던 그것을 위해 살아가고 있다는 거다.

⟪뿌리⟫가 지금까지 나에게 주고 있는 메세지는 이것이다.

“너는 자유인으로 살아가고 있나?”

내 눈에 비친 주인공 “쿤타킨테"는 단 한 번도 노예였던 적이 없었다.
한평생 그의 중심은, “무엇에 얽매이지 아니하고 자기 마음대로 할 수 있는” 바로 그 상태였다.

“무엇이 우리를 자유인으로 만들어주나?“라는 질문에, 쿤타킨테의 삶을 보며 조심스럽게 대답해본다.

나의 대답: “지킬 것이 있는 사람"이 자유인으로 살 수 있다.

정말 지키고 싶은 게 있는 사람은, 흔들리지 않는다. 내가 지키려고 하는 그것과 다른 무언가를 교환하지 않는다. 타협하지 않는다. 고통과 아픔이 뒤따르더라도, 설령 죽음이 그걸 가로막는다 하더라도. 그것을 지켜낸다. 이런 사람이야말로,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자유로울 수 있다.

⟪사피엔스⟫가 주장하는 것처럼, 세상은 끊임없이 상상의 질서를 우리 내면에 주입하고 있다면, 그래서 우리를 영원히 감옥에 가둬놓으려고 한다면. 내 안에 그보다 더 단단하고 묵직한 바윗덩어리 같은 무언가를 딱ㅡ 박아놓을 수 있다면, 그것이 우리를 노예의 삶으로부터 지켜줄 수 있지 않을까?

쿤타킨테 - 그의 딸 키지 - 그의 아들 조지 - 그의 아들 톰 - ・・・・・・・・
그들 안에는 지키고 싶은 것이 있었고, 신분과 상관없이 그들은 자유인이었다.
그들은 목숨을 걸고 자유를 쟁취해 낸 것이다.

21세기를 살아가고 있는 우리들에게도 마찬가지인 것 같다.
자유는 목숨을 걸고 쟁취해 내는 것이다.

진리를 알지니 진리가 너희를 자유하게 하리라 요한복음 8:32

성경에 있는 말씀이다.

⟪뿌리⟫를 읽고나서, 그제야 이 말씀이 나에게 확ㅡ 다가왔다.

내가 지키고 싶은 것이,
절대 변하거나 무너지거나 없어지지 않을 진리라면,
그 어떤 것으로부터도 침식당하지 않을 단단하고 묵직한 진리라면,
그것이 나를 자유인으로 살아갈 수 있게 해 주지 않을까?

내 중심에 진리를 두고 살아갈 때, 그것이 나를 진정 자유하게 해 줄 수 있지 않을까?

나는 오늘 노예로 살았나? 자유인으로 살았나?

(요즘에는 안 하게 되었지만 ㅋㅋ) 예전 지안이에게 매일 회사에서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 주던 시절이 있었다. 아빠의 일상이 궁금했었던지, 회사에서 있었던 이야기를 아주 재밌게 듣더라.

“아빠 친구 OO가 이런저런 일을 했어~”
“회의 시간에 이런저런 일이 있었어~”
“이런 문제가 있었는데 이렇게 해결했어~”

이렇게 얘기를 하다 보면, “왜?“라는 질문을 한다. 그럼 난 지안이에게 내가 왜 그런 행동을 했는지 이유를 설명해야 한다. 대부분 설명을 잘 못 한다. 회사에서 일어나는 복~~잡한 상황들을 이 아이에게 어떻게 설명해주나…. ㅡ,.ㅡ;;;
지안이가 이해할 수 있도록 설명하려면, 지안이도 이해할 수 있는 명확한 기준이 있어야 하고, 그 기준에 의해 이러이러한 행동을 했다고 얘기해야 한다. 그 기준은 명확하고 심플해야 하는데, 그래야 지안이가 이해를 하고 다음 이야기를 이어갈 수 있다.

명확하고 심플한 기준.
그러한 기준은 분명한 가치에서 나온 것이어야 하더라.
즉, 내 안의 가치로 인해 세워진 기준으로 나의 행동을 결정할 때, 지안이가 알아들을 수 있게 이야기할 수 있더라.
이런 게 없다면, 지안이에게 해 줄 이야기가 없다.
다시 말하면, 이런 게 없다면, 나의 일상에 나의 이야기는 없다.

그러면서 발견한 것은,
하루를 보내면서, 내 안의 가치/기준으로 행동한 일이 별로 없더라 ;;;

아ㅡ 내가 오늘 했던 그 행동은, 내 안의 가치/기준으로 한 행동이 아니라, 복잡한 상황에 떠밀려 어쩔 수 없이 하게 된 행동이었구나.
그때, 나는 그 상황의 노예였구나.

나의 삶을 살기

요즘 일상의 작은 목표가 있다면, 나의 삶을 사는 것이다. 세상에 단 하나뿐인 유일한 사람으로 오늘 하루를 살아가는 것이다. 그리고 주변 동료들도, 그들 자신의 삶을 살도록 도와주는 것이다. 나도 모르고 있던 내 안의 기준을 끌어내도록 도와주고, 그것으로 행동을 하도록 하는. 얼마 전에 올린 시끌벅적한 사무실 만들기 이야기도, 그런 일상의 이야기 중 하나다.

저 거대한 감옥 속에서 살아간다 하더라도
그 무엇에도 갖히지 않은 자유로운 삶을 살 수 있으면 좋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