살면서 넘어야 할 벽은 계속해서 나타난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친구와의 경쟁이나 학교 시험 등 자잘한 벽들을 마주하며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된다.
아마 대부분 이들이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큰 벽은 대학 입시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벽을 넘고 난다고 해서 내 삶이 순조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 후 취업의 벽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게 되고, 그 벽을 넘고 나면 그동안 잘 넘겨왔던 벽은 사소해 보이게 만드는 또 다른 큰 벽을 마주하게 된다.
매번 나타나는 그 벽을 깨부수고 나가야 할 것 같은 사회적 압박 속에서, 도장 깨기와 같은 피곤한 삶이 이어진다.
나를 형성하는 것은, 매일 숱하게 마주하게 되는 순간의 작고 사소한 결정들이다.
그 결정들은 오롯이 나의 순간의 가치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방금 내가 한 그 결정은 어디에 가치를 둔 결정이었나?’
그리고 그런 결정(나의 가치를 확인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이 쌓여서 나라는 사람이 형성되어간다.
일상의 사소하고 작은 결정에는 나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이 비교적 적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 유행, 압박, 환상, 허황된 희망, 사회적 이슈,,,
이런 주변 것들에 휘둘릴 일 없이 오롯이 내 내면에서 판단이 내려지고 행동으로 나타난다.
다른 사람에 비해 내가 특별히 잘하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언어가 달라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원하는 것을 해내는 것이다.
전문적인 기술이라 하기엔 좀 잡스러운(?) 느낌이 있긴 하지만, 어디서 생겨났는지 모르는 이 능력(?)에 대해 궁금해졌고, 이것을 진지하게 파헤쳐보고 싶어졌다.
경험들 일단 나의 경험에 대한 썰을 먼저 풀어본다.
오스트리아(독일어)에서 억울한 벌금 환불받기, 2007년 2007년 오스트리아를 여행할 때,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서 벌금을 내게 되었다.
나중에서야 그건 단순한 의사소통 문제였고, 내가 부당한 벌금을 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뿌리⟫라는 책을 읽고 하나의 프레임이 생겼다.
자유인 or 노예
특정 프레임에 갇힌 채 세상을 보는 것은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좋지 않은 점이 있긴 하지만, 복잡한 세상을 바라볼 때, 특정 관점에 대한 (그 관점 아닌 것들은 제외하고) 선명한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프레임은 꽤 유용하기도 하다.
자유인 or 노예 프레임은 지금도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어서, 종종 나 자신에게 묻곤 한다.
“나는 오늘 노예로 살았나? 자유인으로 살았나?”
지금 시대에, 21세기에. 노예란 웬 말인가?
아주 작은 변화, 시작 <7월 1일> 새로운 회사로 이직한 지 2달이 지났다.
사무실 분위기는 꽤 시끌벅적한데. 개발자들은 입도 뻥끗 안 하고 심각한 얼굴로 모니터만 쳐다보고 있고, 고객과 소통하는 사람들의 전화 목소리만 우렁차다. 우렁찬 목소리에는 넘치는 자신감(?)과 회사 내에서의 위치(?)가 드러나는 것 같다. 개발자들은 식사할 때조차 입을 잘 열지 않는다.
나와 함께 일하는 몇몇 친구들에게 git으로 협업하는 방법을 설명해주고, 이번 주부터 gitlab의 Merge Request 기능을 써서 코드 리뷰를 하기로 했다. 이슈를 등록하고, 브런치를 만들고, 코드 작성 후 자신의 repo에 푸쉬하고, Merge Request를 만들고, 디스커션을 하고, 머지를 하는 과정을 보여주며 설명해주었다.
얼마 전, 내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는 (늘 신선한 글로 내 생각을 틔워주셨던) 김재수 선배님의 이야기가 화두였다. 김재수 선배님은 <청소년 매일성경>에 칼럼을 기고해 왔는데, 지난달 성경의 “다섯 달란트 비유"를 한 달란트 받은 사람 입장에서 해석한 글을 실었다. 그 글에 대해, “주류에 어긋난 좌파식 성경 해석"이라는 항의가 빗발쳤고, 결국 <청소년 매일성경>에서는 김재수 선배님의 연재를 중단했단다.(기사 보기)
성경 해석에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담았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는 설교시간에 이 얘기를 하면서 김재수 선배를 ‘악마, 마귀, 사탄’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코드를 작성하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아주 작은 기능을 담당하는 작은 조각 하나를 만든다.
그런 조각을 2~3개 더 만들어 그것들끼리 연결을 지어놓는다.
이렇게 해 놓으면 꽤 많은 기능을 처리해낸다.
작은 조각 하나하나는 아주 단순한 몇 가지 기능만 할 뿐인데, 그런 것들이 2~3개만 모여도 꽤 다양한 기능을 해낸다.
2~3개의 조각이 모인 그것을 또 여러 개 만들어본다.
그리고 그것들이 상호 작용하게 한다.
서로 연결을 지어주는 것만으로, 훨씬 더 많은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너무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넘쳐난다.
두서없는 그대로 써내려가 본다. ㅋㅋ
다행이다 얼마 전 결혼 10주년이었다. 매해가 다이나믹 했지만, 특히 지난 일 년은 정말 다이나믹 했다.
출근하면서 이적의 “다행이다"를 듣는데, 눈물이 핑 돌더라. 내가 이적처럼 불러주지는 못하지만, 아내한테 노래를 보내주며,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얘기했다.
정말 다행이다.
성장 엊그제 퇴근하는데, 같은 팀 한 친구랑 우연히 지하철역까지 걸어가게 되었다. 처음 같이 일해보는, 중국말 엄청 어눌한 외국인이랑 20여 분 가량을 걸어가야 했는데, 딱히 할 말이 없어서였던지(ㅋ) 그 친구가 이렇게 물어보더라.
몇몇 소수의 모습이겠거니 생각했다.
근데 소수가 아닌 것 같다.
나 역시 교회 공동체 속에서 자라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맴돌고 있던 생각이다.
감정을 빼낸 상태의 글을 이제야 공유해 본다.
교회는 어떻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가? 교회의 바운더리 교회에서 금기시되는 말이 있다. 그 말을 꺼내거나 모두가 동의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혼난다.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로 혼나면 억울한 마음이 들고 기분이 나쁘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큰 영향을 주진 않는다.
코로나 19로 온 세상이 난리다. 나 개인의 삶도 난리였다.
꽤 큰일을 치르고, 7월 1일이 되었다.
때마침 새벽에 눈이 떠졌고, 뭐라도 남겨야 할 것 같아서 오랜만에 끄적여본다. ㅎ
2주 전 공식적으로 해고 통지를 받고, 어제 北京衣念科技 사무실로 마지막 출근을 했다. 정확히 4년 반 동안이다.
그리고 오늘 새로운 회사에 출근한다.
북경에서 보낸 지난 4년이 시도와 실패의 반복이었지만, 특히 지난 3개월은 정말 새로운 시도와 실패가 반복되는 매일을 보냈다. 청산하기로 한 회사에서 남아 있는 동료들과 뭐라도 해보려고 했었고, 동료들의 이후의 삶을 위해 매각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도 해 봤었고, 200개가 넘는 이력서를 돌리며 취업의 문을 두드렸었고, 새로운 사업 준비도 해 봤었다(시작도 하기 전에 망했다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