절대적으로 옳은 것?!

얼마 전, 내 페이스북 타임라인에서는 (늘 신선한 글로 내 생각을 틔워주셨던) 김재수 선배님의 이야기가 화두였다. 김재수 선배님은 <청소년 매일성경>에 칼럼을 기고해 왔는데, 지난달 성경의 “다섯 달란트 비유"를 한 달란트 받은 사람 입장에서 해석한 글을 실었다. 그 글에 대해, “주류에 어긋난 좌파식 성경 해석"이라는 항의가 빗발쳤고, 결국 <청소년 매일성경>에서는 김재수 선배님의 연재를 중단했단다.(기사 보기)
성경 해석에 자신의 정치적 견해를 담았다는 것이다.
어떤 목사는 설교시간에 이 얘기를 하면서 김재수 선배를 ‘악마, 마귀, 사탄’이라고 표현하기까지 했다.

(1)주류에 어긋난 (2)좌파식 (3)성경 해석 - 이 짧은 표현이 나에겐 이렇게 해석되었다.

  • 주류에만 머물러 있으려고 하고 비주류의 생각은 허용하지 않는 교회
  • 여전히 좌파를 악의 축으로 생각하는 교회
  • 성경 해석을 신학자/목사의 전유물로만 생각하는 교회

인간, 정치적 동물

대한민국 국민이라면 반드시 정치적 입장을 취해야 하고 그것을 표명해야 한다. 그것은 우리의 권리이자 의무이다. 민주주의 국가인 우리나라에서는 꽤 넓은 범위의 정치적 입장이 허용된다.

  • 보수 정당 또는 진보 정당을 지지할 수 있고,
  • 사업주(고용주) 또는 노동자의 입장을 지지할 수도 있다.
  • 의 입장에 좀 더 가까울 수도 있고, 의 입장에 좀 더 가까울 수도 있다.
  • 적법한 절차를 통한 시위, 파업 등의 활동도 허용된다.

아마 양 끝단 어느 한쪽으로 확 가있는 사람은 그리 많지 않을 것 같다. 그보단, 양 끝단 사이의 어느 지점에서 어떤 경우에는 저쪽 어떤 경우에는 이쪽으로 왔다 갔다 하며 적당한(?) 지점에 서 있을 것이다. 당연하다. 우리는 양쪽의 이야기를 충분히 접하고, 그 속에서 내가 설 지점을 찾으면 된다.

각자가 다 다를 수 있다. 그래서 국민이 주인인 민주주의 국가에서는 투표를 통해 입장을 정하고, 비교적 많은 사람이 지지하고 있는 방식대로 나라가 운영된다. 이것은 아주 당연하고 건전한 방식이다. 그리고 이러한 의사를 자유롭게 표현할 수 있다. 우리 모두는 이 복잡한 상황 속에서 나의 입장을 정하고 살아간다. 즉, 우리 모두는 정치적인 입장을 취한채로 살아가고 있다는 것이다. 그리고 우리의 생각, 말, 행동에는 당연히 나의 정치적 입장이 묻어나온다.

나는 오늘도 여러 사람을 만나 대화를 나누었는데, 그 안에서 그 사람이 가진 정치적 입장을 확인할 수 있었다. 교회에서도 마찬가지. 설교, 기도, 나눔 등 곳곳에 정치적 입장이 스며들어 있음을 확인할 수 있다. 이것은 당연하고 건전하고, 마땅히 그러해야 한다.

혹자는 그렇게 생각할지도 모른다. 나는 정치적 입장이 없다고. 혹시 이 글을 읽고 있는 당신이 그렇게 생각한다면,
‘혹시 내가 오직 단 하나의 정치적 입장만 허용하고 있진 않은지…?’
스스로를 한번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도덕 매트릭스는 사람들을 하나로 묶어주지만, 그것은 다른 매트릭스가 가진 논리(심지어 다른 매트릭스의 존재까지도)를 못 보게 하는 면이 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은 세상에 하나 이상의 도덕적 진실이 있다는 사실을 헤아리는 데 무척이나 어려움을 느낀다. 사람을 판단하거나 사회를 운영하는 정당한 틀도 하나 이상 있을 수 있다는 사실 역시 마찬가지이다.

– 《바른마음》 p. 215

정치적이지 않은 성경 해석이 가능한가?

성경에도 꽤 다양한 정치적 입장이 있다.
앞에서 언급한 보수/진보, 사업주(고용주)/노동자, 갑/을, 다수자/소수자, 등등 다양한 정치적 입장이 나타나 있고, 성경 속에는 상황에 따라 이쪽 또는 저쪽을 지지하는 말씀들이 있다. 그래서 이 부분을 보면 이런 입장이 옳은 것 같고, 저 부분을 보면 저런 입장이 옳은 것 같다.
혹시 성경에서 단 하나의 입장만 보인다면, 역시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성경에서 나에게 길들여진 모습만 보고 있는 건 아닌지..? 갖가지 이름으로 포장된 반쪽자리 예수를 보고 있는 건 아닌지..?’

절대적으로 옳은 입장이 있는 것이 아니라, 상황 안에서 해석해내야 할 문제다. 그래서 우리는 성경을 읽으며 나의 정치적 입장을 점검하고 돌아보며 그것을 소모임 속에서 자유롭게 나눌 수 있다. 그리고 이미 많은 소모임 속에서 정치적인 이야기들을 많이, 아주 많이 나누고 있다. 이것은 아주 좋은 일이고 적극 장려해야 한다. 교회가 속세를 떠나서 내면의 수양만을 강조하는 것이 아닌,, 이 땅에 발을 딛고 세상 속에서 살아가야 함을 가르친다면, 우리가 살아가는 이 세상의 구조에 대해 이야기를 하는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다.
단지, 문제가 있다면,, 단 하나의 정치적 입장만 옳다고 생각하는 관점이다.

내가 정치적이지 않다고 생각한다면, 혹은, 우리 교회/모임에서는 정치적은 대화는 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면, 또다시 의심해 볼 필요가 있다.
‘내가 속한 그곳은, 오직 단 하나의 정치적 입장만 허용하고 있는 건 아닌지..?’

김재수 선배님의 달란트 비유 해석이 좌파식 성경 해석인지 아닌지는 잘 모르겠으나
(일단 이 부분부터 동의가 안됨ㅡ,.ㅡ),
성경을 해석할때 나의 정치적 견해가 들어가는 것이 무엇이 문제란 말인가?
오히려 나의 정치적 견해를 빼는것이 문제가 아닌가?
“자기 세대에 하나님의 목적을 섬겼던 다윗”(사도행전 13:36)처럼 지금 시대를 향한 하나님의 목적을 섬기기 위해서는 지금 우리가 살아가고 있는 이 시대의 상황 속에서 성경을 읽을 수 있어야 할 것이다.
사회의 구조적인 문제를 외면한채 성경을 본다?
정치적이지 않은 성경 해석이 과연 가능한가?

혹시, 두려움인가?

얼마 전 벙개로 “책 읽어드립니다"를 진행했었다.
《바른마음》이라는 책을 소개하고 서로의 생각을 나누는 자리였다. 그 자리에 모인 대부분은 기독교인이었고, 종교가 없는 분이 2분 참여했었다.
마치고 돌아가는 길에서 대화를 나누다가, 종교가 없으신 그분이 이런 질문을 하셨다.
“지금 교회는 태양이 지구를 돌고 있다고 믿나요?”
함께 길을 가던 어느 분께서 당연히 아니라고 말씀하셨고, 그때는 과학적 지식이 부족해서 그렇게밖에 해석할 수 없었다고 답하셨다.
그러자 그분의 이어지는 질문,
“그러면 지금 옳다고 생각하는 것도 나중에는 바뀔 수 있겠네요?”
……
이 주제에 관한 대화는 더는 진행되지 않았지만, 서로의 의도는 교환된 듯 보였다. 질문자가 무슨 말이 하고 싶었었는지는 굳이 여기 적지 않아도 되겠지…

우리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 생각하고 있는 것의 어떤 부분은, 사실 누군가의 해석일 수도 있다. 해가 뜬다는 표현을 태양이 지구를 도는 것으로 해석했던 것처럼.

지금 세상은 너무 빨리 변하고 있다. 이전에 [매일 변화하기]라는 글에서도 썼지만, 세상은 너무나 빨리 변해서 지금까지 인류가 쌓아왔던 것을 아무것도 신뢰할 수 없는 시대가 되고 말았다. 사람들은 “4차 산업혁명"이라는 말까지 만들어내며 나름대로 대응을 해 보려고 하고 있다. 이 혼란스러움 속에서 교회는 오히려 동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는 것을 선택한 것처럼 보인다. 귀 막고 눈 감고 아무것도 말하지 않는 것을 선택한 것 처럼 보인다.

교회는 도대체 무엇을 두려워하는 걸까? 사람들이 하나님을 떠나게 되는 것을 두려워하는 걸까? 아니면, 지금까지 긴 시간 쌓아 왔던 좋은(?) 전통이 사라지는 것을 두려워하는 걸까?

급변하는 세상 속에서, 마구 쏟아지는 정보의 홍수 속에서, 어떤 학자들은 지금이 제2의 르네상스라고 얘기하기도 한다. 그만큼 새로운 이론과 사상과 연구와 이야기들이 지금 쏟아져 나오고 있다는 것이다.

[교회는 어떻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가] 글에서도 썼듯이, 이 세상을 내 생각으로 해석할 능력을 배우지 못한 교회는, 우물을 더 깊이 파는 방식을 택하는 것 같다. 동굴 속으로 더 깊이 들어가 숨어 버리려고 하는 것 같다.

절대적으로 옳은 것

기독교는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믿는 종교다. 하지만 사람들이 다양함으로 받아들여야 할 많은 부분까지 절대적으로 옳은 것의 범주에 포함해 버리면서 갈등을 만들어 내는 것 같다.
어쩌면 우리 크리스천들은 너무 섣불리 절대적으로 옳은 것을 정해 버리는 건 아닌가 싶다.

성경은 우리에게 꽤 많은 자유를 허용하고 있다. 지금까지 수천 년 흘러온 교회사 안에서 많은 교리 및 신앙적 이론들이 바뀌어왔다. 그리고 여전히 많은 종파에서 각자 자신의 공동체에 맞는 신앙의 방식을 정립해서 그것을 따르며 살아가고 있다. 이것만 보더라도, 내가 생각하는 그것을 절대적으로 옳은 것이라고 주장한다는 것은, 너무 독선적인 것은 아닐까?

다시 위에서 말한 책 모임 이야기.
몇몇 분들이 종교가 없는 그분께 교회에 오라고 권유를 했는데, 나중에 그분이 이렇게 메시지를 보내셨다.

“저는 세상에는 많은 생각이 있고 그 생각들에 대해 고민해보고 싶고 이해해보고 싶은 입장인데, 교회의 방식대로 한다면 책 내용처럼 “절대적으로 옳은 것”에 둘러싸여 다른 의견을 보지 못하게 될까 봐, 교회 사람들과의 의견을 교회 밖에서 나누는 방식이 좋다고 결론지었었어요.”

교회를 바라보는 이 세상의 시각을 극명하게 보여주는 것 같다.

세상의 바른 가치에 대해 고민하고 길을 찾아보려고 하는 청년에게 아무런 도움을 주지 못하는 교회.
오히려 그 무리 속으로 들어가면 나도 그들처럼 “눈 막고 귀 닫고” 살게 될까 봐 피하고 싶은 무리가 되어버린 교회.
그렇게 교회는 점점 더 동굴 속으로 들어가고 있는 듯하다.

잘 모를 때는, 그냥 잘 모르겠다고 말하면 안 될까? 그냥 개인적인 생각이라는 말을 앞에 붙이면 안될까? 지금 상황에 맞는 어떤 성경 구절이 생각난다면, 그래서 이게 정답이라고 확언하지 말고, 그냥 솔직하게 그 구절이 생각났다고만 얘기하면 안 될까?

대화의 희열

요 며칠 이 생각으로 머리가 꽤 복잡했었다. 그러던 중, 아내의 추천으로 《대화의 희열》이란 프로를 봤는데, 그것을 보는 내내 기분이 좋더라. 상대방의 이야기에 귀 기울이며, 대화를 통해 점점 더 깊은 내면으로 들어가는 모습이, 보는 나까지도 눈시울을 붉히게 하더라. 대화에 참여한 패널들도 눈가와 코끝이 촉촉해지며 대화를 이어가더라. 나도 저런 대화를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는 생각을 했다.

한 사람의 있는 그대로의 모습을 그대로 받아주고, 상대방의 이야기 한 마디 한 마디에 귀 기울이고, 그런 대화를 진행하면서 참여자들의 생각이 바뀌고 성장해 가는 게 보였다. 물론 방송이라 짜여진 부분이 있겠지만, 진심이 없다면 전달되지 않았을 긍정적인 에너지가 모니터를 통해 전달되었다.

이 글에서 쭉 써내려 갔던 그런 독선적인 모습이 나에게도 있을 것이다. 상대방의 있는 그대로를 인정하는 대화의 모습을 나도 배우고 싶다.

뜬금없이, 《대화의 희열》 이라는 TV 프로그램 이야기로 이 글을 마무리 지으려고 한다.
급마무리 ㅎㅎ (귀차니즘 약간 있음 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