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를 형성하는 것은, 매일 숱하게 마주하게 되는 순간의 작고 사소한 결정들이다.
그 결정들은 오롯이 나의 순간의 가치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방금 내가 한 그 결정은 어디에 가치를 둔 결정이었나?’
그리고 그런 결정(나의 가치를 확인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이 쌓여서 나라는 사람이 형성되어간다.
일상의 사소하고 작은 결정에는 나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이 비교적 적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 유행, 압박, 환상, 허황된 희망, 사회적 이슈,,,
이런 주변 것들에 휘둘릴 일 없이 오롯이 내 내면에서 판단이 내려지고 행동으로 나타난다.
다른 사람에 비해 내가 특별히 잘하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언어가 달라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원하는 것을 해내는 것이다.
전문적인 기술이라 하기엔 좀 잡스러운(?) 느낌이 있긴 하지만, 어디서 생겨났는지 모르는 이 능력(?)에 대해 궁금해졌고, 이것을 진지하게 파헤쳐보고 싶어졌다.
경험들 일단 나의 경험에 대한 썰을 먼저 풀어본다.
오스트리아(독일어)에서 억울한 벌금 환불받기, 2007년 2007년 오스트리아를 여행할 때,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서 벌금을 내게 되었다.
나중에서야 그건 단순한 의사소통 문제였고, 내가 부당한 벌금을 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뿌리⟫라는 책을 읽고 하나의 프레임이 생겼다.
자유인 or 노예
특정 프레임에 갇힌 채 세상을 보는 것은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좋지 않은 점이 있긴 하지만, 복잡한 세상을 바라볼 때, 특정 관점에 대한 (그 관점 아닌 것들은 제외하고) 선명한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프레임은 꽤 유용하기도 하다.
자유인 or 노예 프레임은 지금도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어서, 종종 나 자신에게 묻곤 한다.
“나는 오늘 노예로 살았나? 자유인으로 살았나?”
지금 시대에, 21세기에. 노예란 웬 말인가?
코드를 작성하는 것은 정말 재미있는 일이다.
아주 작은 기능을 담당하는 작은 조각 하나를 만든다.
그런 조각을 2~3개 더 만들어 그것들끼리 연결을 지어놓는다.
이렇게 해 놓으면 꽤 많은 기능을 처리해낸다.
작은 조각 하나하나는 아주 단순한 몇 가지 기능만 할 뿐인데, 그런 것들이 2~3개만 모여도 꽤 다양한 기능을 해낸다.
2~3개의 조각이 모인 그것을 또 여러 개 만들어본다.
그리고 그것들이 상호 작용하게 한다.
서로 연결을 지어주는 것만으로, 훨씬 더 많은 기능을 담당하게 되었다.
너무 오랫동안 글을 쓰지 않았다.
그래서 머릿속에 이런저런 생각들이 두서없이 넘쳐난다.
두서없는 그대로 써내려가 본다. ㅋㅋ
다행이다 얼마 전 결혼 10주년이었다. 매해가 다이나믹 했지만, 특히 지난 일 년은 정말 다이나믹 했다.
출근하면서 이적의 “다행이다"를 듣는데, 눈물이 핑 돌더라. 내가 이적처럼 불러주지는 못하지만, 아내한테 노래를 보내주며, 함께 할 수 있어서 정말 다행이라고 얘기했다.
정말 다행이다.
성장 엊그제 퇴근하는데, 같은 팀 한 친구랑 우연히 지하철역까지 걸어가게 되었다. 처음 같이 일해보는, 중국말 엄청 어눌한 외국인이랑 20여 분 가량을 걸어가야 했는데, 딱히 할 말이 없어서였던지(ㅋ) 그 친구가 이렇게 물어보더라.
몇몇 소수의 모습이겠거니 생각했었다.
근데, 소수가 아닌 것 같다.
나 역시 교회 공동체 속에서 자라 왔다. 앞으로도 그럴 것이고.
꽤 오래전부터 머릿속에 멤돌고 있었던 생각이다.
감정을 빼낸 상태의 글을 이제야 공유해 본다.
교회는 어떻게 사람을 바보로 만드는가? 교회의 바운더리 교회에서 금기시되는 말이 있다. 그 말을 꺼내거나, 모두가 동의한다고 생각하는 것에 대해 이의를 제기하면 혼난다.
나의 어린 시절을 돌아보면,
이해가 되지 않는 이유로 혼나게 되면 억울한 마음이 들고 기분이 나쁘긴 하다. 하지만 그것이 나에게 그렇게 큰 영향을 주진 않는다.
코로나 19로 온 세상이 난리다. 나 개인의 삶도 난리였다.
꽤 큰일을 치르고, 7월 1일이 되었다.
때마침 새벽에 눈이 떠졌고, 뭐라도 남겨야 할 것 같아서 오랜만에 끄적여본다. ㅎ
2주 전 공식적으로 해고 통지를 받고, 어제 北京衣念科技 사무실로 마지막 출근을 했다. 정확히 4년 반 동안이다.
그리고 오늘 새로운 회사에 출근한다.
북경에서 보낸 지난 4년이 시도와 실패의 반복이었지만, 특히 지난 3개월은 정말 새로운 시도와 실패가 반복되는 매일을 보냈다. 청산하기로 한 회사에서 남아 있는 동료들과 뭐라도 해보려고 했었고, 동료들의 이후의 삶을 위해 매각 과정에 적극적으로 개입도 해 봤었고, 200개가 넘는 이력서를 돌리며 취업의 문을 두드렸었고, 새로운 사업 준비도 해 봤었다(시작도 하기 전에 망했다 ㅋ).
어릴 때 난 꿈이 없었다. 어른들이 ‘꿈, 장래 희망’ 이런 것들을 물어볼 때 나만 뭔가 뒤떨어진 것 같은 느낌이었다. 다른 친구들처럼 ‘축구선수’, ‘농부’, ‘선생님’, ‘의사’ 이런 대답을 바로 해버리고 싶었는데, 난 그런 게 없었다. “아직 없어요"라고 부끄럽게 말하기도 하고, 그때그때 ‘과학자’, ‘의사’ 이런 것을 만들어내서 말하기도 했다. 어른들이 그런 곤란한 질문을 할 때면 대충 얼버무리거나, 아니면 잠시 ‘루저loser 패배자‘가 되어야 했다.
고2 때 문과/이과를 나눠야 했다. 난 국어/영어보다는 수학/과학이 재밌었고 점수도 그쪽이 높았다.
마음의 준비 2019.02.03 인천공항에서 환승 대기 중
어제 저녁부터 머리가 아팠다. 체했나 보다.
한솔이가 나를 보더니 얼굴이 완전 노랗단다. 너무 신경을 많이 쓴 게 아니냔다.
아니라고 했지만, 한솔이는 몸이 다 안다고 말했다.
맞는 말이다. 아니라고 생각했지만 신경을 많이 썼었나 보다. 2019년이 시작되면서 아웃리치와 고등부 총무 일이 많이 부담이 됐었나보다. 신경써봤자 내가 할 수 있는 것은 아무것도 없었다. 그냥 아플 뿐이다. 아무리 애를 써도 바뀌는 것은 없고, 오히려 할 수 있는 것 이상의 것을 하려다 번아웃되고, 체하고, 얼굴은 노랗게 변해버린 채 아픈 머리를 잡고 누워버린다.
지난 2019년 2월 3일부터 2월 10일까지 마나도 아웃리치팀 23명(김덕영, 김보섭, 김영식, 김찬미, 김혜인, 김효진, 류호선, 문준상, 박세미, 박윤이, 백지원, 이미영, 이수원, 이은규, 이일, 이채은, 이한솔, 장재휴, 전민규, 정비상, 최희서, 하지윤, 한승용)은 예정된 사역을 무사히 마치고 돌아왔다. 지난 일주일간의 사역을 돌아본다.
마나도 in 인도네시아 인도네시아는 17,000여 개의 섬으로 이루어진 나라다. 그중 12,000여 개는 무인도이고 사람이 사는 섬은 5,000여 개이다. 우리 간 곳은 인도네시아 중앙에 있는 큰 섬, 술라웨시섬 북쪽 끝에 있는 마나도(Manado)라는 도시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