노트를 열고 손에 펜을 잡는 그 순간, 내 생각도 열린다.
어떤 생각이 떠올라서, 그 생각을 쓰기 위해 노트를 펴는 것이 아니라
노트를 열 때, 그때 생각도 열리기 시작한다.
그 누구에게도 보여줄 필요가 없는, 그래서 포장할 필요가 없는,
멋있어 보이는 뭔가를 쥐어짜기 위해 힘을 줄 필요도 없고,
미사여구를 붙일 필요도 없고, 부끄러워 빼버릴 필요도 없다.
그렇게 온몸에 힘을 빼고 나면, 그제야 나도 인지하지 못하고 있던 진짜 내 생각이 나오기 시작한다.
흰 종이에 한글자 한글자 써 내려가지는 딱 그 속도만큼만 생각도 흘러나온다.
평가 요즘 우리 회사는 평가 시즌이다. 먼저 스스로 자신의 성과에 대해 평가하면, 팀의 매니저가 한 번 더 평가를 해서, 두 가지 점수를 가지고 최종 평가를 하는 방식이다. 첫 번째 회사에서도 비슷한 방식으로 평가를 했었었다. 의미 없는 숫자놀음에 기가 차고 화가 치밀어 올랐던 사회 초년생 때가 생각나서 피식 웃음이 나왔다. ㅋㅋ
나름대로 평가 항목과 기준을 세우고 내가 한 일에 대한 점수를 적어 넣었다.
내 점수는 78.9점.
그렇게 적어 넣어서 매니저에게 보냈는데 곧바로 회신이 왔다.
지난주 월요일 줌으로 돌아가신 할아버지 추도 예배를 드렸다. 설교는 아버지가 하셨고, 아모스 5장 24절 말씀이었다. 정의에 대한 말씀이었는데, 설교의 주 내용은 할아버지의 삶의 한 부분에 관한 이야기였다. 불의와 타협하지 않고 기꺼이 손해를 감수하시며, 정의로운 삶을 선택해서 그렇게 살아가셨던 할아버지의 삶의 이야기였다. 할아버지가 한 번도 이렇게 살아라 저렇게 살아라! 말씀은 하지 않으셨지만, 삶으로 보여주신 가르침을 배우며 살자는 말씀이었다.
나에게도 그런 배움이 있다. 많은 부분이 있지만, “돈”에 대한 가치관에 절대적인 영향을 준 부모님의 가르침이 있다.
오랜만에 사무실 이야기다.
중국 회사에서 일한 지 일 년 반 정도가 되었다. 한번 이직해서 지금은 두 번째 회사다.
이번 회사에서는 회의에 참여 할 때가 많은데, 주로 복잡한 문제를 풀어야 하는 설계 관련 회의다.
나는 아직 중국 친구들이 말하는 디테일한 내용까지 모두 다 알아듣지 못한다.
겨우겨우 이해해서 부족한 정보를 바탕으로 판단을 내려야 할 때가 많다.
자연스럽게 한 발 떨어진 관찰자 입장에서 판단을 내리게 되는데, 때론 이런 나의 입장이 도움이 될 때도 있는 것 같다.
지난 주일 한 고등학생 아이가 불쑥 이런 얘길 했다.
“쌤~! 노력이 나를 배신할 때도 있는 것 같아요”
“그렇지 그럴 수 있지. 근데 너 대단하다. 어떻게 이걸 벌써 깨달았어?”
노력은 종종 우리를 배신한다 왜냐하면 우리의 노력으로 커버할 수 없는 부분이 너무 많아서일 것이다.
우리에게 주어지는 결과 중에 나의 직접적인 노력으로 인해 얻은 부분은 그리 크지 않은 것 같다. 때론 노력한 것보다 더 많이 얻기도 하고, 때론 열심히 했지만 좋지 않은 결과가 돌아올 때도 있다.
주니어 시절, 욕심 많은 아이처럼 이 기술 저 기술을 목적 없이 마구마구 집어삼키던 시절이 있었다. 아이들이 포켓몬 카드 수첩에 새로운 아이템 카드를 넣고, 그걸 쳐다보며 마냥 흐뭇해하는 그런 마음처럼, 새로운 기술을 내 머릿속에 집어넣고 한번 써봤다는 것으로 우쭐해 질 때가 있었다
그러다 비즈니스 목표에 집중하고 그것을 동료들과 함께 이뤄가는 재미를 알고부터, 해결하려는 문제에 집중하고, 의미 있는 것을,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뭔가를 만들어내는 재미에 빠져 몇 년을 보냈다.
올해 처음 접해본 것들 그러다 올해는, 다시 여러 새로운 기술들을 접하게 되었다.
살면서 넘어야 할 벽은 계속해서 나타난다.
우리는 어릴 때부터 친구와의 경쟁이나 학교 시험 등 자잘한 벽들을 마주하며 학창 시절을 보내게 된다.
아마 대부분 이들이 처음으로 맞닥뜨리는 큰 벽은 대학 입시가 아닐까 싶다.
하지만 그 벽을 넘고 난다고 해서 내 삶이 순조로워지는 것은 아니다.
그 후 취업의 벽 앞에서 한없이 작아지게 되고, 그 벽을 넘고 나면 그동안 잘 넘겨왔던 벽은 사소해 보이게 만드는 또 다른 큰 벽을 마주하게 된다.
매번 나타나는 그 벽을 깨부수고 나가야 할 것 같은 사회적 압박 속에서, 도장 깨기와 같은 피곤한 삶이 이어진다.
나를 형성하는 것은, 매일 숱하게 마주하게 되는 순간의 작고 사소한 결정들이다.
그 결정들은 오롯이 나의 순간의 가치 판단에 의해 이루어진다.
‘방금 내가 한 그 결정은 어디에 가치를 둔 결정이었나?’
그리고 그런 결정(나의 가치를 확인하고 실행에 옮기는 과정)이 쌓여서 나라는 사람이 형성되어간다.
일상의 사소하고 작은 결정에는 나의 판단을 흐리게 하는 것이 비교적 적다.
주변 사람들의 시선, 유행, 압박, 환상, 허황된 희망, 사회적 이슈,,,
이런 주변 것들에 휘둘릴 일 없이 오롯이 내 내면에서 판단이 내려지고 행동으로 나타난다.
다른 사람에 비해 내가 특별히 잘하는 것이 있다.
그건 바로, 언어가 달라 말이 통하지 않는 곳에서 원하는 것을 해내는 것이다.
전문적인 기술이라 하기엔 좀 잡스러운(?) 느낌이 있긴 하지만, 어디서 생겨났는지 모르는 이 능력(?)에 대해 궁금해졌고, 이것을 진지하게 파헤쳐보고 싶어졌다.
경험들 일단 나의 경험에 대한 썰을 먼저 풀어본다.
오스트리아(독일어)에서 억울한 벌금 환불받기, 2007년 2007년 오스트리아를 여행할 때, 터미널에서 버스를 타면서 벌금을 내게 되었다.
나중에서야 그건 단순한 의사소통 문제였고, 내가 부당한 벌금을 냈다는 것을 알게 되었다.
⟪뿌리⟫라는 책을 읽고 하나의 프레임이 생겼다.
자유인 or 노예
특정 프레임에 갇힌 채 세상을 보는 것은 사실을 왜곡할 수도 있다는 점에서 좋지 않은 점이 있긴 하지만, 복잡한 세상을 바라볼 때, 특정 관점에 대한 (그 관점 아닌 것들은 제외하고) 선명한 시각을 제공한다는 점에서 프레임은 꽤 유용하기도 하다.
자유인 or 노예 프레임은 지금도 나에게 영향을 주고 있어서, 종종 나 자신에게 묻곤 한다.
“나는 오늘 노예로 살았나? 자유인으로 살았나?”
지금 시대에, 21세기에. 노예란 웬 말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