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알아?”
지안이한테 전화가 왔다. 오늘이 무슨 날인지 아냐고 묻는다.
알지. 당연히 알지.
해마다 4월 16일이면 지안이에게 오늘이 무슨 날인지 이야기 했었다. 오늘은 저녁 약속이 있어 바깥에 있었는데, 지안이가 전화해서 먼저 4월 16일을 이야기 한다.
“지안이 오늘이 무슨 날인지 기억하고 있구나. 앞으로도 잊지말자”
“응~”
기억은 과거가 아니다. 미래다.
기억은 내 안에서 이야기를 만들어내고 그 이야기는 미래로 이어진다. 그래서 기억은 살아있다. 없어지지 않고 세상에 여전히 존재한다.
기억의 힘을 믿는다.
대곡역에서 출발하는 서해선. 텅빈 지하철이 들어온다. 보이지 않는 자리 쟁탈전, 위치선정이 중요하다. 문에 들어서서 오른쪽으로 몸을 틀었다. 빈자리가 눈에 띄었다. 마음이 조급해진다. 간발의 차로 다른 사람이 앉았다. 얼른 왼쪽으로 고개를 돌렸다. 빈자리가 눈에 들어왔는데, 이미 늦었다! 다른 사람이 막 앉아버렸다. 아침부터 참 정신없다. 아ㅡ 맞다! 오늘 내 생일이지.
지난 삼다 독회때 보미님 글이 인상적이었다. 죽음을 편안하게 말하더라. 나의 장례식에 올 조문객에게 들려줄 글을 쓰고 그때를 위한 음악을 선곡하고. 나의 존재를 죽음이 어찌할 수 없다는 강함이 느껴졌다.
출생 일제시대 말, 경북 의성에 살던 신재식은 결혼하고 만주로 갔다. 그곳에서 첫째 아들을 낳은 후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냈다. 해방 후 아내의 시신을 화장하고 유골을 통에 담아 아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왔다. 박재익은 고향 마을에서 한 남자를 만나 결혼을 했다. 뱃속에는 아기가 자라고 있는데 남편은 풍토병으로 생을 마감했다. 아내를 하늘나라로 보내고 아들과 함께 고향으로 돌아온 신재식. 남편을 먼저 보내고 딸과 함께 남겨진 박재익. 두 사람은 새 가정을 이루었다. 1954년 가을에 다섯 번째 아이 순자가 태어났다.
또다시 맞이하는 12월 31일이다.
한해의 마지막 날이라고 뭐 특별한 게 있을리 없지만, 이럴 때 괜히 연말 분위기에서라도 지난 시간을 돌아보는 것도 나쁘진 않겠다.
작년 12월에 한국에 들어와서 첫 일 년을 보냈다. 올 한해는 하이데어를 가동시키는데 많은 에너지를 썼다. 일이 이렇게 커질지 모르고 가볍게 시작했던 하이데어가 점점 무게감을 드러내었고 거기에 제대로 뛰어들게 만들었다. 올해는 그렇게 시작되었다.
‘멈추지만 말자!’
예상보다 더 척박했지만, 이 생각으로 꾸역꾸역 다음 스텝을 이어왔다. 호들갑스럽게 다른 스타트업들 흉내도 내보고, 무턱대고 이일저일 벌여보기도 했다.
태초에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셨다. 보시기에 좋았단다.
창조의 기쁨이 채 가시기도 전에 하나님은 실패했다. 자신의 피조물에게 반역 당했다. 어쩌면 예정된 실패였는지도 모른다. 그들과 사랑을 나누고 싶었다면 사랑밖에 못 하도록 해야지, 자기 멋대로 할 수 있는 존재로 만들었으니 실패가 보장된 길이다. 선악과도 그렇다. 뭐든지 마음대로 먹으라 해 놓고 딱 하날 먹지 말라니 원 참. 제 뜻대로 해도 좋은 사람은 자유롭게 그 먹음직하고 보암직한 과일을 따 먹었다. 하지만 하나님은 실패로 귀결될 수밖에 없는 판을 흔쾌히 짜고 그 안으로 기꺼이 침투하신다.
지난 수요일에 에버랜드에 갔었다. 사파리 버스를 타고 호랑이, 사자, 곰들을 봤다. 그 가엾은 동물들은 버스 창 바로 앞에까지 와 개인기를 부리며 꼬맹이들의 입에서 환호성을 불러내 주었다.
사자 암수 한 쌍씩 여기저기 널브러져 있다. 암수가 같이 있는 게 사이가 좋아 보인다. 6~7쌍 정도 있어 보였는데, 모두 평화롭게 지내고 있다. 그 평화로움이 슬펐다.
원래 사자는 무리를 지어 생활한다. 보통 수사자 하나에 암사자 여러 마리와 새끼들이 한 무리를 이룬다. 사냥은 암사자의 몫이고 수사자는 그냥 어슬렁거릴 뿐이다.
어린 시절 기억 속의 아버지는 앞서 걷는 사람이었다. 우리 삼 남매는 엄마 손을 잡고 옆으로 늘어져서 걸었고 아버지는 서너 발 앞에 있었다. 걸음걸이도 빨랐다. 작년 10월 아버지는 전립선암 수술을 받았다. 이제 아버지는 어머니의 손을 잡고 천천히 움직이신다. 세월이 많이 지났구나.
아버지는 경주 관광공사에서 노조 지부장을 하셨다. 앞장서서 운동하다가 이런 생각을 했단다.
‘지금 시대에 노동 운동을 한다는 건 목숨을 바치는 거구나. 어차피 목숨을 바칠 거라면 하나님께 바치자.’
바로 사표를 쓰고 신학교에 들어갔다.
오랜만에 아버지, 어머니와 같이 셋이 식사를 했다. 결혼한 이후로는 늘 아내와 동행했고 자녀가 생기고 나서는 항상 손녀에게 관심이 먼저 갔다. 이렇게 엄마 아빠랑 식사한 게 몇 년 만인지… 이런저런 대화를 나누다가 하이데어 이야기가 대화 주제로 떠올랐다.
창업한 지 2년이 되어간다. 용케도 버티고 있다. 돈은 이미 바닥이 났지만 겨우 월급 날짜에 맞추어 돈벌이가 생긴다. 딱 한두 달 치 일이 생겼다가 돈이 바닥나고, 또 다음 월급날이 다가오기 며칠 전에 작은 프로젝트가 성사되어 계약금이 들어온다.
어렸을 때 가정 형편이 넉넉하지 못했다. 그래도 어머니께서 요리 실력이 좋으셔서 맛있는 음식을 늘 푸짐하게 먹었던게 사실이다. 하지만 기억엔 아쉬운것만 남는다. 엄마가 해 주신거 말고, 삐까번쩍한 식당에 가서 먹는 음식들이 참 맛있어보였는데, 특히 돈까스, 스파게티, 피자,, 이런 서양 음식들이 그랬다. 하지만 집안 형편상 그런 음식을 먹어볼 순 없었다.
그 아쉬움은 몸에 남았다.
그게 언제 드러나느냐면 뷔페에 갔을 때다. 거기 있는 음식들은 전부 다 한 번씩 먹어봐야 한다. 괜히 서양 음식들이 맛있어 보인다.
2019년에 썼던 글에서 내가 어떻게 꿈을 가지게 되었는지를 이야기했었다. 이번 글은 그 이후의 이야기다.
사무실을 나의 세상으로 세상의 변화는 어디서 뚝 떨어지는 것이 아니라, 지금의 자리에서 조금씩 움직이는 것이다. 크고 멋있게 진행되는 일들은 오래가지 못한다. 아주 조금일지라도 지금 있는 그 자리에서 움직일 수 있을 때, 그런 일들만 지속할 수 있다. 결국, 내 옆에서 함께 살고 있는 사람들이 바로 나와 함께 이 세상을 더 나은 곳으로 만들어 갈 사람이다.
2019년, 난 나의 세상을 사무실로 정의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