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책은, 1960년 즈음부터 1980년까지 20여 년의 긴 이야기를 쓴 책이다.
《아리랑》, 《태백산맥》에 이어 조정래의 또 하나의 대작이다.
저 두 개의 소설과 비교되는 점은,
《한강》에선 주인공의 활약이 돋보이기보다, 이야기의 줄기를 만들어가는 건 시대의 흐름이었고(그래서 제목을 ‘한강’으로 지었나?), 주인공들은 휙휙 뒤바뀌는 시대를 끈질기게 살아갈 뿐이었다.
교과서에서 한 줄짜리 사건으로 쓱 보고 지나갔던 일들이 실제 그때를 살아가던 사람들에게 어떤 의미였을지 간접적으로 경험해 볼 수 있었다.
이 세상은 자신의 삶을 살아가는 한 명 한 명의 삶이 이야기가 모여 만들어진다.
그저께 한국으로 갈 짐을 보냈다.
총 16박스가 나왔다.
16박스. 그걸 듣고 누가 이렇게 얘기한다.
“캠핑처럼 이사하시네요.”
맞다. 캠핑처럼.
한때 여행에 한창 목말라서 여기저기 배낭 메고 막 돌아다녔었는데
2010년 아프리카 여행을 끝내고 돌아오면서, ‘그만해도 되겠다’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그때 들었던 마음이 “여행을 일상처럼, 일상을 여행처럼"이었다.
이제 더 이상 여행지를 떠돌아다닐 필요가 없었다.
일상이 여행지였다.
급하게 짐을 보냈더니, 미처 보내지 못한 짐들이 보인다.
‘아ㅡ 꽤 많네? 이걸 어떻게 가져가지?’
미련이다.
짐 보낼 때 생각나지 않았던 그건, 내 소유가 아니다.
2020년 회사가 없어지고, 중국에서 버티기로 했던 동료가 한 명 더 있었다.
그 친구도 살길을 찾아 북경을 떠나 상해로 가야 했을 때, 이런 얘길 했었다.
“이 세상을 강한 멘탈 만으로 살아가기에는 만만치가 않을 거야.”
그러면서 내가 믿는 하나님을 소개했다.
“나도 멘탈이 꽤 강한 편인데, 그 멘탈을 믿고 살기엔 세상은 그리 호락호락하지 않더라.
하나님이 아니었으면 난 진작에 못 버티고 무너졌을 거야.
내 삶을 진짜로 지키고 싶으면, 멘탈이 아니라 하나님을 믿어야 해.”
그 후 여기서 3년을 더 보냈다.
“선택과 집중”
회사 생활을 시작한 이후로 너무 많이 들어서 이젠 식상해질 정도다. 뭔가를 시작하기 전에, 너도나도 또 이 식상한 단어를 꺼내면서 *딴짓금지*를 강요한다. 이쯤 되면 괜한 반발심까지 든다. ㅋ
선택에 대해 1안이냐? 2안이냐?
더 중요한 것을 선택하고 싶은 마음은 알겠으나, 해보지 않은 두 갈래길 중 하나를 고르는 건 도박에 가깝다.
결정을 요구받은 그는 엄청 고민하는 척, 고민 코스프레 ㅋ 후에 하나를 결정한다. 그리곤 그 길을 밀어붙힌다. 당연히 결과는 기대에 못 미친다.
어제 아침 교회에서 충격적인 소식을 들었다.
어떻게 이런 일이…
뒤에 앉아서 예배드리는 고등부 아이들을 보는데, 설교가 귀에 들어오지 않았다.
다 비슷한 또래 아이들이었을 텐데…
지금 내가 뭘 해야 할까…?
고등부 선생님으로써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이 있었다.
그건, 세상의 아픔을 외면하지 말고 그 아픔을 함께하며 그들을 위해 기도해야 한다는 것.
이 아이들도 어쩌면 태어나서 처음 접했을 그 충격적인 소식에 어떻게 해야 하는지 몰랐을 텐데. 그럴 때 어떻게 해야 하는건지, 그것을 가르쳐야 했다.
2018년 우간다 아웃리치 팀에 합류했는데, 대부분이 대학생, 고등학생들이었다. 대학생들은 갑자기 합류한 나를 어떻게 부를지 고민하다가 그냥 선생님이라고 부르자고 정하더라. 그래서 그때부터 내 호칭은 “장쌤” 이 되었다.
처음으로 선생님이라 불리게 되었는데, 그 호칭에 괜히 심각했었다. ㅋ
내가 왜 선생이지? 그들은 나보다 모든 부분에서 더 나아 보이는데. 내가 뭘 가르쳐줄 수 있다고…
그들은 아무 생각 없이 붙인 호칭에 나만 쓸데없이 진지했었다 ㅋ
난 그들에게 가르쳐줄 수 있는 게 없었다. 그래서 그 호칭이 부담스러웠다.
2016년 안영회님이 “아기발걸음(Baby Step)“을 얘기 했을 때는 ‘그냥 좋은 말이겠거니…’ 생각했었다. 일주일 단위로 빠르게 움직이는 조직 안에서 4년을 보냈지만 그게 내 삶에 체화되지는 않았었다.
그러다, 2020년 XP 책을 다시 읽고 눈이 번쩍 떠졌다. 내 삶의 지침서로 받아들이고 진짜 이렇게 살아보려고 했다.
그때부터 내 삶의 주기를 일주일로 두고, 일주일 마다 변화를 만들어보려고 했었다.
처음으로 기타 연습을 시작했고, 아프리카 여행 추억팔이 용으로만 가지고 있던 젬베를 들고 교회 찬양팀에 들어가 다른 세션들이랑 맞춰보기 시작했다.
허무해지지 않을 행복이 있을까?
(전도서 2장을 읽고)
행복의 방향이 내가 아닌 다른 사람에게 있을 때, 내가 없어져도 그 행복은 다른 사람 안에서 여전히 남아있다.
원래 목적이 그거였으니, 내가 가진 게 사라져도 상관없다. 나로인해 다른 사람이 행복해하는 것으로 이미 보상을 받았다. 그것이 곧 나의 기쁨.
어떻게 다른 사람의 행복을 목적으로 삼을 수 있을까?
2020년 초 회사가 없어졌다. 충격이 있었으나 거기서 걸어나올 수 있었던 건, 회사를 유지하는 것이 거기서 일하는 목적이 아니었다. 함께 일하는 동료가 있는 사무실을 나의 세상으로 정의하고, 나의 세상(사무실)을 변화시키는 것이 매일 출근해서 일하는 목적이었다.
“세상이 이렇게 될 줄 알았었나?”
오랜만에 고등학교 친구랑 대화하다가, 고민을 토로하는 그에게 한 말이다.
맞다.
그때는, 어른이 된 우리가 맞이할 세상이 이런 모습일 거라고 상상도 못 했다.
그는 자기 분야에서 전문성이 꽤 쌓였고 30대 초반에 회사도 세워, 한때 올해의 스타트업 top 10에 꼽히기도 했었다. 지금은 대기업에서 수십명을 이끄는 부서장이다. 그런데도 그는 불안을 느끼며 뭔가 더 공부하고 준비해야 한다고 느끼더라. 프로그래밍을 공부해야 할 것 같은데 무슨 책으로 시작하면 되냐고 나한테 묻기도 하고.
오늘의 수고를 내일 보상받으려고 할 때. 막상 내일이 되어 어제의 수고에 대한 보상을 받으려고 하면,
허무함이 밀려온다.
수고와 보상의 시간 간격이 클수록 허무함은 커진다.
수고에 대한 보상을 그때그때 받지 못하고 그걸 미래로 미뤄둘수록, 보상에 대한 기대감은 커지고 수고에 대한 본전 생각도 커진다.
막상 보상을 받을 때가 되면 기대했던 것과는 다른 현실에 허무함을 느끼게 된다.
“내가 원했던 그게 이거였어?”
원했던 결과에 도달하지 못했을 때의 상실감은 이루 말할 수 없을 듯.
“지금까지 뭘 한 거지?